영국의 위임통치 : 이-팔 분쟁의 시작이 되다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본다

by 다두



1920년 영국과 프랑스는 국제연맹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정한 대로 중동 지역을 나누어 통치하겠노라며 위임통치(Mandate) 안을 제출하고 승인해 주기를 요구했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재편하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통해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설립된 최초의 국제기구였다. 미국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입하지 못했다.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가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가졌다.


1922년 국제연맹은 영국이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라크를 통치하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의 통치하도록 하는 위임통치안을 승인했다.


그런데 영국이 국제연맹에 제출한 위임통치안에는 1917년의 발푸어 선언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안 전문에, 유대인 민족의 고향(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을 팔레스타인에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발푸어 선언의 핵심 문장과 다르지 않았다.


국제연맹은 의도였는지 무관심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없지만 영국의 위임통치안에서 이 내용을 별도로 구분하거나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승인했다. 결국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민족 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발푸어 선언도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아 국제법적 효력을 가지게 된 결과를 만든 것이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국가 수립을 국제사회가 합의로 했다며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적극 지원하고,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급증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은 토지를 매입하여 키부츠(농업공동체)를 설립하며 유대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텔아비브 등 남부 해안 도시는 유대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유대인 중심의 상업과 금융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영국 군정(고등판무관)의 유대인 위주 정책과 유대인들의 공세적인 정착 활동에 위기감을 느끼며 반유대인 반영국 정서를 키워가게 되었다.


1936년 텔아비브에서 아랍인 노동자가 유대인 이민자를 사살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 이민자들이 아랍인 노동자 숙소를 습격하여 아랍인 노동자를 사망하게 한 사건은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대규모 봉기로 확대되었다.


봉기를 주도한 아랍인 종교 지도자 아민 알 후세이니는 총파업을 선포하고, 유대인 이민 중단, 유대인과의 토지 매매 금지, 다수 아랍인 중심의 대의원 제도 신설을 요구했다.


영국 군정은 아민의 요구를 거부하고 아랍인에 대한 강경 진압을 예고했으며, 아랍인들은 이에 분노하여 무장 투쟁 방식으로 영국과 유대인에 대항하고 나섰다. 농민들과 지방의 무장 세력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유대인과 영국군을 공격했다. 무장 투쟁은 3년 이상 계속되었다.


영국 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진압 작전에 나서 아랍인 20,000여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하고 유대인과 영국군도 수백 명이 사망했다. 영국은 일단 무장봉기의 기세를 제압하기는 했으나 아랍인들의 감정까지는 진압하지 못했다.


1939년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정부는 ’백서’(White Paper)를 통해 유대인 이민을 제한하고, 유대인 국가 수립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국가 대신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동으로 자치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유대인들은 격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영국이 발푸어 선언을 배신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고, 일부는 무장 투쟁 세력을 조직했다. 유대인의 영국에 대한 분노는 국제사회의 동정표를 얻기도 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와 학살 행위에 대해 심각히 우려하고 있었다.


영국의 이민 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은 사실상 큰 제한 없이 계속되었다. 하가나(Haganah) 등 유대인 단체들은 비밀리에 유대인들의 유럽 탈출과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지원했다.


하가나는 팔레스타인에 이주한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방어할 목적으로 자체적으로 결성한 무장 조직이었다. 이들은 아랍인의 봉기(1936~1939) 기간 영국군을 도와 유대인 정착지를 방어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영국이 이민 제한 정책을 발표하자 이에 반대하며 비밀 이민 선박 조직을 결성하여 유럽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왔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탈출한 유대인들에게 하가나의 이민선은 생명선이나 다름없었다.


하가나는 1948년 유대인들이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 창설한 이스라엘 방위군(IDF)의 근간이 되었다.


영국의 일부 균형 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변혁을 실감하지 못한 아랍인들은 영국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간헐적인 반영국 반유대인 투쟁을 이어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아랍인 지도자 아민은 팔레스타인 유대인 문제가 이미 영국의 손을 떠났다고 판단하고, 2차 세계 대전 중 나치를 방문하여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이 같은 행보는 그의 반유대인 투쟁 운동의 선명성에 중대한 흠집을 낸 것으로, 영국과 유대인 사회에서 나치 협력자라는 오명을 얻고 팔레스타인을 떠나 레바논으로 망명하였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기간은 유대인 이민 증가, 유대인-아랍인 충돌이라는,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구조적 기초를 만든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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