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인티파다 - 하마스가 탄생하다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본다

by 다두


1차 인티파다


1987년 12월 가자지구 자발리아 난민촌에 거주하는 아랍인 4명이 이스라엘군 트럭에 깔려 사망했다. 이스라엘군은 의도치 않은 단순 사고였다고 주장했으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군의 계획적인 보복 행위라고 간주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사건 하루 전 가자지구에서 한 유대인이 칼에 찔려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범인을 팔레스타인인으로 지목하고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루머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자지구 전역에서 이스라엘군의 보복 행위를 규탄하는 항의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는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으로까지 확대되어 민중봉기 수준으로 폭발했다. 1차 인티파다(민중봉기를 의미하는 아랍어)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은 무력 진압에 나섰다.


팔레스타인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팔레스타인 남쪽에서 밀려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생활의 터전이 좁혀지고,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마저도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미 20여 년 동안 이스라엘군의 점령 아래 있어왔다. 이들의 현실은 지난 40여 년 동안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토지를 빼앗겨 피폐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함에 따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점령 후에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의 불만과 분노는 부모 세대의 그것보다 훨씬 강했다.


이스라엘 군용 차량에 아랍인이 깔려 사망한 사건은 이러한 불만과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를 테러로 규정하고 8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주요 도시와 난민촌을 봉쇄했다. 실탄, 최루탄, 고무탄, 물 대포를 발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비무장 청소년들에게 곤봉을 휘둘렀다. 수많은 민간인이 죽거나 다치고 체포 구금되었다. 체포와 구금은 영장이나 재판 없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시위에 참여하거나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집은 이스라엘군에 의해 철거되거나 파괴되었다. 이스라엘군은 이들의 유일한 수입원인 올리브 나무를 절단하고 생계 기반을 파괴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족적 분노를 진압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이스라엘군에 돌멩이를 던지며 철군을 주장했다. 어른들은 이스라엘의 총파업, 세금 납부 거부, 이스라엘 제품 불매운동 등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며 이스라엘에 맞섰다. 문화 예술인들은 곳곳에 저항을 의미하는 그라피티와 팔레스타인 국기를 그리며 투쟁의 의지를 고취했다. 지식인들은 이스라엘군의 폐교 조치에 맞서 지하 학교를 운영했으며, 여성들은 시위대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부상자를 치료했다.


무장한 이스라엘군이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청소년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장면은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으로 상징되며 세계인의 분노를 자극했다.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테러리스트라는 주장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팔레스타인인은 불의에 대항하는 저항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 것이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과잉 진압을 비판했다.


1차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5년 이상 계속됐다. 팔레스타인인 사망자 1,200여 명(17세 이하 청소년 53명 포함), 이스라엘 사망자 160명, 팔레스타인인 부상자 수만 명, 팔레스타인인 체포 · 구금자 수만 명이라는 통계를 남겼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인티파다가 거대한 불의로부터 자신들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정의로운 항거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하마스 창설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의 격동 속에서 하마스라는 급진 무장 단체가 탄생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온 PLO가 현실 안주적 세속 주의에 빠져 투쟁보다는 성과 없는 협상에 의존하는 무능한 조직이라고 비판하며, 이슬람주의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무장 저항 조직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 압델 아지즈 알란티시, 마흐무드 자하르 등 팔레스타인 무슬림 형제단에서 일해온 강성 인물들이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Harakat al-Muqawama al-Islamiyya’(이슬람 저항 운동), 약칭 Hamas를 조직했다. Hamas는 아랍어로 ‘열정’ 또는 ‘힘’을 뜻하기도 한다.


무슬림 형제단은 1928년 이집트에서 하산 알반나가 무슬림 활동가들을 규합하여 시작한 일종의 이슬람 NGO 단체였다. 이들은 코란과 하디스(무슬림의 행동양식)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사회 계몽 운동을 전개했으며, 팔레스타인으로도 확대되어 종교 교육, 자선 활동, 사회 복지와 봉사 활동의 중심체 역할을 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에서의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은 점차 정치적 성격으로 변해갔으며 마침내 하마스라는 반이스라엘 저항 조직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하마스의 초기 목표는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이스라엘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무장 조직 알카삼 여단(Izz ad-Din al-Qassam Brigades)을 조직하고 자살 폭탄, 로켓 공격, 게릴라전 등 무장 투쟁을 주도했다. 동시에 이슬람식 사회 복지 사업을 통해 빈곤층과 대중의 지지 기반을 넓혀갈 수 있었다.


하마스의 창립자이자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은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1936년 6월 현재의 이스라엘 남부 아슈켈론에서 출생했다. 16세 때 운동 중 사고를 당해 사지가 마비되어 평생을 휠체어에 의존하며 살았다. 카이로 알아즈하르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중퇴했으며, 이후 아랍어 교사로 활동하며 종교적 설교와 대중 연설로 영향력을 넓혀갔다.


1973년에는 이슬람 자선단체 ‘무자마 알이슬라미야’를 설립하여 빈민 구호 활동을 전개하면서 지명도를 확대하고 하마스 창설을 주도했다. 1989년에는 이스라엘에 협력한 하마스 내부 배신자를 처형하도록 지시했다는 혐의로 이스라엘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그러나 1997년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요르단 암만에서 하마스 해외 정치국장 칼레드 마샬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서 수감자 교환 석방 방식으로 풀려나 가자지구로 복귀하여 하마스와 가자 주민을 이끌어왔다. 이스라엘로서는 야신은 원한 맺힌 적장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스라엘 감옥에서 야신을 구해낼 수 있었던 하마스 정치국장 칼레드 마샬 암살 미수 사건은 아직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랑스러운 무용담으로 구전되고 있다.


1997년 9월 이스라엘 모사드는 요르단 암만을 중심으로 하마스의 해외 조직을 지휘하고 있는 마샬 정치국장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2명의 모사드 요원은 캐나다 위조 여권을 소지하고 관광객으로 위장하여 암만으로 잠입하여 마샬의 소재를 추적하고 동선을 미행했다. 요원들은 한 시장 입구에서 마샬에게 접근하여 그의 귀에 독극물을 분사했다. 이 물질은 신경계를 자극하여 수 분 안에 사람을 혼수상태로 빠지게 하는 독성 화학물질이었다. 마샬은 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며, 주변에 있던 마샬의 경호원들이 즉각 대응하여 모사드 요원 2명 모두를 붙잡아 암만 경찰에 인계했다.


요르단 당국은 수사를 통해 이들이 모사드 요원들이며 사건은 이스라엘의 계획된 암살 시도였음을 확인했다.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은 자국에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행태를 주권 침해 행위로 규정하고 크게 분노했다. 후세인 국왕은 우선 이스라엘에 마샬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해독제를 보내라고 요구하고, 모사드 요원들과 이스라엘 정부에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통보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 국왕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들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에서 이 사건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체포된 자국 요원들을 은밀히 구출해 올 계획을 세웠다. 모사드는 전문 요원들로 구출 팀을 구성하고 외교부 출장 직원으로 위장하여 요르단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들여보냈다. 그들은 자국 대사관을 요르단에 체포된 모사드 동료 요원 구출 작전의 거점으로 삼고 본국의 작전 개시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르단 정보 당국이 이스라엘의 이러한 움직임을 놓칠 리 없었다. 요르단 정부는 모사드 구출 팀을 마샬 암살의 동조자로 규정하고 대사관을 포위하여 이들 구출 팀 요원들도 요르단에 인계하라고 요구했다. 후세인 국왕은 이스라엘 대사관이 국제 테러의 기지로 활용되는 상황에서는 외교적 치외법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대사관에 대한 폭격도 불사하겠다고 압박했다. 사건은 확대되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번져갔다. 국제사회는 또 다른 중동전쟁을 우려하며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긴장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후세인 1세 국왕과 직접 통화하여 무력이 아닌 평화적 해결 방안을 설득했다. 이스라엘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요르단과 대화를 시도했다.


이스라엘은 마샬 암살을 시도했다고 인정하고 독극물 해독제를 긴급 공수하여 마샬의 의식을 회복시켰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모사드 요원 2명과 이스라엘에 수감 중인 하마스 요원 70여 명을 교환 석방하기로 합의했다. 석방된 하마스 요원 중에 야신이 포함되었다.


야신은 이스라엘군이 제공한 헬기를 타고 가자지구로 귀환했다. 가자 주민들은 야신의 귀환을 영웅의 귀환으로 환영했다. 야신은 하마스 최고 지도자로 복귀하여 대 이스라엘 투쟁의 공세를 정교화해 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야신에 대한 원한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2004년 3월 새벽 기도 후 휠체어를 타고 귀가 중이던 야신은 이스라엘 AH-64 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생을 마감했다. 야신의 장례식에는 2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참석하여 애도했다. 이들은 야신의 시신을 앞세워 행진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를 결의했다.


야신의 뒤를 이어 하마스 최고 지도자로 선임된 압델 아지즈 알란티시도 한 달 뒤 이스라엘 공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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