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본다
와디 아라바 협정(Wadi Araba Agreement)은 1994년 10월 26일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의 와디 아라바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이 서명한 평화협정이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1948년 중동전쟁 이후 예루살렘과 서안지구에 대한 관할권을 두고 적대 관계를 이어왔다.
1차 중동전쟁에서 요르단은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점령하고 1950년에는 합병을 선언했다. 요르단은 서안지구 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자국의 행정, 재정, 사법 제도를 그대로 적용했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요르단을 물리치고 이 지역을 점령했다. 요르단은 이스라엘의 점령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철군을 요구하며 서안지구에 대한 관할권을 계속해 왔다.
1988년 PLO가 팔레스타인 독립을 선언함에 따라 요르단은 서안지구에 대한 대표권과 PLO에 넘기고 합병 정책을 중단했다.
오슬로 협정(1993년)으로 서안지구에 대한 관할권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행하게 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자치정부의 자치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스라엘도 서안지구에 자치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자국 영토가 아랍 국가들에 의해 포위되는 형국이 되어 안보 위협이 커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요르단과의 평화협정을 희망했다. 미국은 요르단에 경제 지원과 채무 탕감을 조건으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제안하고 요르단은 이를 받아들였다.
요르단의 주장으로 협정에는 요르단의 ‘특별한 역할’을 명시했다. 이는 요르단이 예루살렘 성전산의 바위 돔 사원과 알-아크사 사원에 대한 관리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었다.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이 서안지구에 대한 합병을 포기하고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을 추진하면서도 알-아크사 사원에 대한 관리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알-아크사 사원에 대해 각별한 감정과 기억을 가진 인물이었다.
후세인 1세 국왕은 선지자 무함마드의 직계 혈통임을 자부하는 하심 가문의 후손으로서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사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왕실의 책무를 짊어지고 살았다. 더욱이 그는 할아버지인 압둘라 1세 국왕이 1951년 알-아크사 사원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 무스타파 슈크리의 총격으로 암살될 때 이를 현장에서 목격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15세 소년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압둘라 1세 국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버지 탈랄 왕자가 정신 질환으로 곧 퇴위한 후 17세에 요르단의 3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42년째 요르단을 통치해 오고 있었다.
와디 아라바 협정을 통해 요르단은 이집트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아랍 국가가 되었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상대국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한대 대해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요르단이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 관리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협정에 서명한 것은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가로챈 행위라고 비판했다.
와디 아라바까지 직접 날아가 협정 서명식을 주재한 클린턴 대통령은,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을 이끈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이어 중동 평화의 촉진자로서 미국의 외교적 위상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이후 그는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주재하여 예루살렘 문제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위한 최종 지위 협상에도 깊이 관여하는 등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적극적으로 중동 평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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