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교회 포위 사건-국제사회의 합리적 중재가 긴요하다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본다

by 다두



2002년 4월 200여 명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군의 색출 작전을 피해 기독교 성지인 베들레헴의 성탄교회(Nativity Church)로 피신했다. 이스라엘군은 무장세력에게 투항을 요구하며 교회를 완전히 포위했다. 교회 내부에 있던 수도사, 수녀 등 성직자와 많은 수의 순례객도 무장세력과 함께 포위되었다.


무장세력은 성지에서의 군사적 체포 작전은 용납될 수 없다며 투항을 거부하고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포위망을 강화하며 언제라도 교회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며 무장세력을 압박했다. 양측의 대치 상황은 40일간이나 계속됐다.


이스라엘군은 교회 주변을 완전히 봉쇄하고, 교회 출입구에 감시 장비를 설치하는 한편 저격수를 배치하여 무장세력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감시했다. 확성기를 통해 투항을 종용하며, 무장세력은 자신들의 명분과는 달리 성직자와 민간인을 인질로 잡고 있는 테러범에 불과하다며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외부와의 차단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회 내부 사정은 열악해졌다. 식량, 물, 의약품 등이 고갈되며 내부 인원들의 건강 상태도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국제사회의 종교단체와 NGO 등은 교회 내부의 긴박한 상황을 전파하며 인도적 지원과 해법을 호소했다.


바티칸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지 훼손을 우려하며 이스라엘군이 즉각 철수하기를 요구했다. 미국과 EU도 양측의 대치 현장이 성지라는 점과 대치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인도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이스라엘 측에 평화적인 해결책을 촉구했다. 이들 국가들은 무장세력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제3 국으로 이동한다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자고 제안했다.


2002년 5월 10일 이스라엘과 무장세력은 국제사회의 제안을 수용하고 대치 상황을 마무리했다. 성직자와 민간인들이 무사히 풀려났다. 이스라엘군은 포위를 풀고 별다른 충돌 없이 무장세력의 신병을 확보했다.


이스라엘은 추방 형식으로 무장세력들의 제3 국으로의 이동을 허가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 유럽 국가들이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을 수용했다.


성탄교회 사건은 정치, 종교, 인권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축소판으로, 사건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적극적이고 합리적인 중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입증한 사례가 되었다.


베들레헴 성탄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와 유대교도 종교적으로나 역사 문화적으로 의미를 공유하는 상징적인 장소다.


성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베들레헴의 동굴 위에 세워졌다. 예수는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숭배되며, 그의 탄생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성탄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교회 중의 하나로서 기독교의 뿌리를 상징하며 중요한 순례지가 되어왔다.


이슬람에서도 예수는 이사라고 불리며 알라가 보낸 위대한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코란은 예수가 동정녀 마르얌(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기적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지만,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교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이 목동 시절 기름부음(마샤)을 받은 곳으로 유대교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다. 유대 민족의 역사적 뿌리와 연관이 깊다.


성탄교회는 339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후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세웠다. 헬레나는 예루살렘에 성묘교회를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7세기 이슬람의 페르시아가 침공하여 교회를 파괴하려 했으나, 내부 벽화에 그려진 페르시아 복장의 동방박사를 보고 경의를 표하며 파괴를 중단하고 보존했다.


1099년 십자군이 베들레헴을 점령한 후에 성탄교회의 의미는 다시 확대되었다. 십자군에 의해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왕 볼드윈 1세는 이 성당에서 대관식을 갖고 즉위했다.


성탄교회는 15세기 이후 가톨릭 · 그리스 정교 · 러시아 정교 간의 소유권 다툼이 격화되어 교회 내부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기독교는 성탄교회가 자연재해로 훼손되기는 했으나 사람에 의한 물리적인 파괴나 교회 역할이 중단된 점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기독교의 영속성을 상징하는 곳으로 자부한다.


5세기경 지진 등 자연재해로 건물 구조가 흔들리고, 화재로 내부 장식과 목재 구조물이 소실되는 등 훼손되었으나 6세기 경 동로마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훼손된 교회를 철거하고 더 크고 견고한 교회로 재건했다. 이후 십자군 시대, 오스만 제국 시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보수와 복원 작업이 이어졌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2010년 성탄교회 복원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매년 약 200만 명의 순례객이 방문하는 교회의 종교적 가치를 제고할 목적이었다.


2012년 유네스코는 성탄교회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동시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도 포함했다. 이는 자치정부의 복원 프로젝트에 힘을 실었으며, 많은 나라가 복원 작업에 참여했다.


이탈리아 정부와 민간기업은 복원 기술과 자금을 지원했다. 프랑스, 러시아, 그리스, 아르메니아 등 여러 국가의 여러 종파가 복원 작업에 참여했다. 특히 교회 내부의 소박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는 이탈리아 복원 전문가들이 주도했다.


성탄교회는 예루살렘 성묘교회와 다름없이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공동으로 관리해 왔다. 따라서 복원 작업은 이들 종파 간의 합의와 협력이 필수적이었으며, 복원 과정에서 이들의 적극적이고 순조로운 협력은 종파 간의 갈등을 넘어선 화해와 협력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종파들은 성탄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인 성탄 미사에 관해서도 각자의 의례에 따라 각기 다른 날에 엄수한다. 종파들은 다른 종파의 이 같은 의례를 존중하고 지원한다. 로마 가톨릭은 12월 25일, 그리스 정교회는 1월 7일,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1월 19일이 성탄일이다.


매년 12월 24일 성탄 자정 미사와 음악회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참석한다. 이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이슬람뿐만 아니라 이 종교와 종파를 수용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리는 의미로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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