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엘 그레코가 16세기 후반 120 x 96 cm 크기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에 전시되어 있다.
엘 그레코(El Greco)의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로 그리스 출신의 스페인 화가다. 그는 1541년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비잔틴 아이콘화를 배우며 미술에 입문했다.
크레타는 13세기부터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섬 주민 대부분은 그리스인으로 동로마 제국의 동방 정교회를 신봉하며 비잔틴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1453년 동로마(비잔틴) 제국이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자, 많은 비잔틴 학자와 화가들은 크레타로 피신했다. 이들은 크레타에서 비잔틴 예술과 신학을 전수하였으며, 크레타 섬은 일종의 문화적 용광로가 되었다.
엘 그레코는 크레타의 수도 칸디아(이라클리온)에서 활동하며 동방 정교회의 성화와 아이콘화 제작 기술을 배웠다. 그의 아이콘화는 비잔틴 양식의 기법을 따르면서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풍을 반영하여 독창적인 스타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티치아노, 틴토레토, 미켈란젤로의 화풍에 심취하기도 했다.
엘 그레코는 1577년 이탈리아를 떠나 스페인의 톨레도로 이주하면서 그의 독자적인 양식을 개척해 나갔다.
그의 화풍은 매너리즘(Mannerism) 양식에 자신의 개성을 보다 투영한 형식이었다. 그의 그림은 길게 늘어진 인체, 극적인 빛과 그림자, 강렬한 색채, 신비로운 분위기를 나타내며 당대에는 ‘기괴하다’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가 이탈리아를 떠나 스페인으로 이주한 이유도 이러한 그의 화풍이 이탈리아 화단에서 환영받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에서도 그의 그림은 그리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왕의 에스코리알 궁전에 자신의 작품을 걸어 달라고 제안했다 거절당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스페인의 주류 화파와도 크게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수도 마드리드가 아닌 톨레도의 종교 기관과 귀족들은 그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환영했다. 톨레도는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기 이전까지 스페인의 수도로서 스페인 교회의 중심지이면서도 이슬람교 유대교의 신앙과 문화도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만의 영적이고 표현주의적 회화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톨레도의 산토 토메 교회는 그에게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그리도록 하고 교회 내에 있는 오르가스 무덤 위에 걸었다. 이 작품은 천상과 지상을 대비하여 죽음과 구원의 순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톨레도 교회의 종교적 열정과 잘 맞아떨어졌다.
엘 그레코는 생전에 호불호가 명확히 구분되어 일부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사후에는 한동안 유럽의 화단에서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19세기말~20세기 초 낭만주의와 표현주의 화풍이 확산되던 시기에 그의 작품은 유럽의 화단에 새롭게 회자되기 시작했으며 당시 혁신적인 화가들을 그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로 평가했다.
엘 그레코의 작품 <프랑스 국왕 성 루이와 시종>(Saint Louis, King of France, and a Page)는 그가 1585년경에 제작한 초상화다.
그림 속의 성 루이는 프랑스의 루이 9세 왕으로, 그는 1297년 프랑스 왕으로서는 유일하게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그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고 정의로운 통치를 펼친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프랑스의 수호성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근거가 되었다. 엘 그레코는 그를 빛나는 갑옷과 붉은 천의 예복을 입혀, 신앙과 정의의 상징으로 표현했다.
붉은 천은 왕의 내면의 열정과 영적 힘을 상징하며, 그의 얼굴에도 그 열정이 반영된 듯한 빛깔이 드러난다. 왕의 오른손에 들린 정의의 지팡이는 통치의 정당성과 신성함을 강조하고 있다. 시종의 존재는 왕의 준비된 전사적 면모를 부각하며, 왕의 날카로운 얼굴형과 대비되는 온화한 분위기로 표현되었다. 엘 그레코는 이 작품에서도 특유의 늘어진 인체 비례와 극적인 색채, 신비로운 분위기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엘 그레코는 루이를 신앙의 전사이자 정의의 수호자로 그려내고, 당시 스페인과 프랑스의 궁정에서 이상적으로 여겼던 기독교적 군주의 이미지로 구현하여, 정치와 신앙, 인간과 초월 사이의 긴장을 시각적으로 풀어냈다.
루이 9세는 프랑스 카페 가문 출신의 왕이다. 카페 가문 출신이 왕위를 이어간 시대를 카페 왕조라 부른다.
카페 왕조의 루이 9세는 아들 필리프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필리프 3세는 다시 아들 필리프 4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필리프 4세는 아들이 없어 그의 왕위는 그의 세 명의 아들,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가 형제 상속 개념으로 각각 왕위를 계승했다. 문제는 이 세 명의 아들 모두도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샤를 4세 이후에는 카페 가문에서 더 이상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
샤를 4세는 아버지 필리프 4세의 동생인 샤를 드 발루아(Charles of Valois)의 아들 필리프 6세(Philip VI)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즉 카페 가문의 방계인 발루아 가문의 사촌에게 왕위를 상속한 것이다. 카페 왕조가 단절하고 발루아 왕조가 시작한 것이다.
발루아 가문은 필리프 6세를 시작으로 앙리 3세까지 13명이 왕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앙리 3세는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1589년 가톨릭 동맹의 열성 신자인 자크 클레망에게 암살당하고 카페 가문의 또 다른 방계인 부르봉 가문의 후손 앙리 드 나바르가 앙리 4세로 왕위를 계승했다. 부르봉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앙리 3세가 암살된 것은 그의 왕위 계승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사건이다. 앙리 3세 시대(1574–1589)는 프랑스가 종교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시기였다. 가톨릭 동맹과 개신교(위그노) 간의 갈등이 극심했고, 왕권은 약화된 상태였다. 자녀가 없는 앙리 3세는 그의 후계자로 카페 왕조의 루이 9세 왕의 후손인 부르봉 왕가의 앙리 드 나바르를 지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앙리 드 나바르가 가톨릭이 아닌 개신 교도였다는 것이다. 이는 가톨릭교도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1588년 앙리 3세는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 앙리 드 기즈와 그의 동생 루이 드 로렌 추기경을 블루아 회의에서 암살했다. 이는 가톨릭 동맹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1589년 8월 1일 도미니코회 수도사이자 가톨릭 동맹의 열성 지지자 자크 클레망은 앙리 3세에게 접근해 그를 단검으로 찔러 암살했다.
앙리 3세의 뜻에 따라 앙리 드 나바르는 앙리 4세로 왕위를 계승했다. 부르봉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앙리 4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낭트 칙령(1598)을 발표하며 종교 갈등을 완화했다. 낭트 칙령은 개신교인 위그노에 대해 일정 범위의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었다.
부르봉 왕조는 앙리 4세부터 루이 16세까지 약 200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다.
앙리 4세를 이어 루이 13세가 즉위했다. 그는 리슐리외 추기경과 함께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루이 13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루이 14세가 즉위했다. 그는 나이 5살 되던 해였다. 그는 태양왕으로서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고 유럽의 군주로서는 최장기간인 72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는 ‘국가가 곧 나다’(L'État, c'est moi)라며 절대왕정을 이끌었으며, 그의 통치는 프랑스 문화, 예술, 군사, 외교의 전성기였지만, 말기에는 재정 위기와 전쟁의 부담을 안겼다.
루이 14세는 아들들이 있었지만 모두 아버지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루이 14세가 사망할 당시 유일한 직계 후손은 5살배기 증손자였다. 그는 루이 15세라는 이름으로 루이 14세의 왕위를 승계했다. 어린 나이의 루이 15세는 오를레앙 공작의 섭정하에 있었으나 이후 자신이 직접 통치권을 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격의 루이 15세의 리더십은 그리 탄탄하지 못했으며 스스로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빠져 궁정 내부도 통제하기에 버거운 형편이 되었다. 궁정 내에서는 측근 정치와 부패가 만연했고, 왕의 애첩인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가 정치의 전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루이 15세도 아들이 있었으나 아버지에 앞서 사망했다. 따라서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망하자 손자인 루이 16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루이 16세는 프랑스 혁명기를 겪어야 했던 마지막 왕으로, 재위 기간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정치적 실패로 결국은 단두대에서 처형된 비극의 군주였다.
루이 16세는 영국과의 7년 전쟁(1756–1763)에서 패배하며 캐나다와 인도 등 중요한 식민지를 영국에 빼앗기는 굴욕을 당했다. 그는 마음속의 칼을 갈며 영국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776년 미국의 13개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루이 16세는 이를 영국을 약화시킬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1778년 미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에 대항하는 독립전쟁에 참전하고 해군, 무기, 자금을 지원하며 미국의 독립을 적극 지원했다.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과 미국의 대륙군은 영국군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승인되고, 영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루이 16세의 복수 의지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재정에 막대한 적자가 발생하며 파산 상태에 몰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과 성직자들은 여전히 면세 특권을 누리며 평민들에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1789년 루이 16세는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로 구성된 삼부회를 소집하여 재정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세금 제도를 결정하려 했다. 그러나 평민 대표들은 이를 거부하고 별도로 국민의회를 선언하며,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필두로 왕정에 저항하는 혁명을 개시했다.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루이 16세는 혁명 세력의 요구대로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를 수용할 것처럼 발표한 후, 신분을 위장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왕당파 군대가 집결해 있는 동북부 국경 근처 몽메디(Montmédy)로 야반도주의 길에 나섰다. 그러나 중간 기착지였던 생트메느울드에서 주민들에게 위장한 얼굴이 발각되고 혁명세력들에 의해 바렌느에서 체포당해 파리로 압송되었다.
1793년 혁명 세력은 루이 16세를 반역 죄인으로 단두대에 세워 처형했다.
루이 16세와 함께 부르봉 왕조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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