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해서 선선한게 좋아 ④
[이전글 바로가기] ③ 교수 이름을 그냥 부르라고?
독일 박사 유학 첫 해, 영어가 자신 없던 나는 연구 발표가 다가오면 2주 전부터 미리 스크립트를 준비해 연습해서 문제가 없었고, 교수와의 미팅도 예상 질문과 대답을 외워 가서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동료들과의 일상 대화였다.
어느 날은 날씨라는 단어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그만 “기후”라고 해버렸다. 연구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앞에서는 나도 웃었지만, 뒤돌아서서는 자꾸 자신감이 뚝뚝 떨어졌다.
'이러다 1년 안에 포기하고 떠나는 건 아닐까.'
언어에 대한 불안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그 곁엔 아주 작은 소원 하나도 같이 자라고 있었다.
'내 이야기 들어주는 다정한 외국인 친구 딱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6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이탈리아 출신 방문 연구원이 한 명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마침 내 옆방에 살던 기숙사 친구와 아는 사이였고, 덕분에 나와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이 친구는 다른 동료들과는 달랐다.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무엇보다 늘 궁금해하는 눈빛이 있었다. 그 덕분에 나도 신나서 먼저 말을 걸 수 있었고, 그러다 내가 모르는 표현이 있으면 그는 자연스럽게 영어 표현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고, 그 과정에서 내 영어 실력도 훌쩍 늘었다.
이탈리아 동료는 말 그대로 사랑이었다. 나는 다른 동료들과는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지만, 이 친구와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사람 사이는 언어가 달라도 마음이 통하면 비로소 가까워진다는 것.
나와 그 친구 사이에 다른 진전이 있었을까? 그는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여서 연인이 될 수는 없었지만, 대신 나에게 제일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외국어는 그 언어로 나와 대화하고 싶어 하는 친구, 단 한 명만 있어도 훌쩍 늘 수 있다. 어린아이를 영어만 사용하는 환경에 던져놓으면 금세 배운다는 말. 아마도 맞는 말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 가장 중요한 건 친구고, 친구와 함께하려면 결국 말을 해야 하니까.
다 커서 배우려면, 정말 큰 결심이 필요하다.
6개월 방문 연구를 마친 그는 영국으로 떠났다.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다.
돌아보면, 나의 독일 유학 첫 해는 혼란스러웠다. 참여하기로 한 프로젝트는 뜻밖의 변동이 이어졌고, 나는 신입임에도 내 프로젝트를 책임져야 했다.
큰 어려움 속에서도, 이탈리아 동료처럼 내 곁을 지켜준 사람들 덕분에 나는 가장 힘든 시간을 무던하게 견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