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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 Oct 23. 2021

몰락

고등학교 1학년

 칠일천하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자사고에 갔던 선배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선배가 자사고에서 1등을 했었는데 일반고로 전학을 왔어.” 그때는 참 이해가 안 갔다. 자사고에서 꼴등한 것도 아니고 1등을 했는데 전학을 왔다는 게. 그랬던 이주현은 외고에 합격한 지 7일 만에 그 뜻을 알아버린다.     


 이제부터는 몰락의 이야기이다. 조금 암울해도 부디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란다.    

 

 나는 솔직히 면접을 너무 못 봐서 외고에 떨어질 줄 알았다. 정말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기숙사에 갈 마음의 준비도 안 했다. 내 예상 밖으로 합격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있었고 기숙사 입소 날, 얼레벌레 내 방을 찾아 들어갔다. 내가 쓰던 방만한 코딱지만 한 방에 잠만 잘 수 있는 2층 침대 2개로 꽉 차 있었다. 그래도 내 인생의 첫 룸메이트라니 설레었다. 그리고 일어과, 독일어과, 영어과, 중국어과 각각 4명으로 이루어진 우리는 정말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학교 첫 날을 기다렸다.     


 “여기 1 분단부터 2 분단까지 선배들은 연세대 가셨고..” 영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우리 선배들이 그렇게 대학을 잘 갔다는 것이다. 영어가 좋아서 온 외고인데 대학까지 잘 갈 수 있다니 감격에 현기증이 날 뻔했다. 그런데 뭔가가 잘못되어 감을 느꼈다. 기쁨은 딱 일주일까지였다.     


 입학 초에는 동아리 모집 기간이었다. 지원서 내고 가위 바위 보 하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동아리는 면접 절차를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면접이라고 해봐야 그 정도로 어려울까. 내 착각이었다. 나는 모든 면접을 망쳤다. 대답을 하고도 소심하게 죄송합니다를 되뇌었다. 당연히 모든 동아리에서 떨어졌고 나는 고등학교에서의 첫 실패를 맛봤다. ‘처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임팩트를 주는지, 나는 다음 허들 앞에서 주저앉았다.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걸까?     


 운 좋게 나는 기숙사 자치회 서포터즈와 학생회 서포터즈가 될 수 있었다. 서포터즈는 정말 중요했다. 내가 속한 그룹이 당선되면 임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야자 끝나고 늦은 자습시간에, 새벽에, 주말에. 정말 많은 시간을 서포터즈 활동에 할애했다. 생기부 스펙에 들어갈 한 줄은 정말 소중했기에 모두가 열심히 했다. 그런데 두 번이나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내가 서포터즈 활동을 했던 회장 후보가 떨어진 날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평소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장난스럽게 "망했다" (순화해서)라고 넘어갔다. 밤늦게 낙선했다는 연락을 받고 룸메들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운 없는 인간인데 다른 사람들이 나와 함께 활동해서 떨어졌나.’ ‘나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인가.’ 다음 허들을 넘을 수도 없이 주저앉은 다리를 일으킬 힘이 없었다.

 

 나의 눈물을 본 룸메들은 나를 안고 같이 울어주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친구들에게 너무 고맙다.


 일생일대의 트라우마     


 하나의 트라우마는 다른 트라우마를 불러온다. 중학교 3학년 학교 방과 후에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쓰는 것에 익숙하지 말하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던 나는 즉석에서 진행된 토론에서 처참히 완패한다.     


 이 상황이 데자뷔처럼 국어 수행평가에서 재현된다. 3대 3으로 토론을 해서 과반수의 표를 받은 팀이 점수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말하는 데에 별로 자신이 없었던 나는 대본을 쓰고 읽는 역할을 맡았다. 대본을 읽고 쓰면 끝이라고 생각해서 토론 순서도 외워두지 않았다. 점점 우리의 순서가 다가왔고, 아무렇지 않았던 심장은 내 가슴을 뚫고 나갈 것처럼 뛰어댔다.      


 준비된 대본을 읽었다. 나의 임무는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나에게는 한 번의 발언 기회가 더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나의 다음 발언 차례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송에서도 정적은 방송사고를 의미한다. 토론 사고였다. 몇 초 간 정적이 흘렀고, 옆에 있던 조원이 나를 찔렀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발언을 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땀이 난다. 다시 생각하면 부끄럽고 당시 같은 조였던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토론에서의 해프닝은 고등학교를 통틀어 가장 떠올리기 힘든 기억이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건 수행평가를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줬다는 것이다. 능력 부족이라는 것도 짜증 나지만 의지 부족에서 비롯된 실수라는 사실이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후에, 시간이 흐르고 나와 친했던 한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무언가를 이루려고 노력하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투덜대기만 해.” 이 말을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붉어진다.


 나도, 밤도, 깜깜했던 그날     


 ‘carpe diem.’ 하도 들어서 지겹다. 현재를 즐겨라. 그런데 난 이 말이 싫다. 누군 모르나. 아는데 못 하는 거지.     


 금요일 밤이었다. 룸메들은 다 집에 가고 기숙사에 나 혼자 남겨졌다. 12시가 넘어서 불을 끄고 혼자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침대에 누워 잠이 오길 바라는데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왔다. 허락도 안 했는데 잡다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봉사 동아리 떨어졌으면 내 봉사 시간은 어떻게 쌓지?’ ‘왜 나는 공부하고도 별로 공부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애들보다 시험을 못 봤지?’ ‘난 왜 이렇게 멍청하지?’ ‘대학에 못 가는 건 아닐까?’ ‘그러면 무시당하겠지?’     

 숨이 안 쉬어졌다. 정말 숨을 못 쉬었다. 무서웠다. 대학에 못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내 숨을 막았다. 숨을 못 쉬게 내 가슴을 꽉 누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동생에게 다급하게 전화했다.     


 “나 숨이 안 쉬어져. 너무 이상해.”    

 “언니, 창문 열고 숨을 마시고 내쉬어봐.”     


 동생이 전화로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 겪는 상황이라 이런 내 몸이 낯설고 두려웠다.  시간이 지나고 진정이 되어 다시 침대에 누웠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서 칼칼한 바람이 들어왔고 풀벌레가 지겹게 소리를 만들어 냈다.

    

 나이를 먹어 어느새 그 아이보다 인생의 선배가 된 나는 그 얘가 가엾다. 얼마나 마음이 약했는지 알고 있기에 가엾다. 얼마나 지겹게 자신을 싫어했는지 알기에 가엾다. 그 밤은 다른 밤보다 유난히 더 깜깜했다.


 우울은 쉽게 전염된다.     

 

 1학년 때에는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시간만 되면 그렇게 펑펑 울었다. “선생님, 저 중학교 때 수학이랑 영어 교과우수상도 탔구요...”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주현아, 그런 건 말할 필요가 없어. 지금 말해봤자 뭐하니.” 선생님은 위로 대신에 상담 시간 내내 우리 반 1등 여자아이 이야기를 주절주절 풀어놓으셨다.   

   

 고등학교 1학년의 나는 슬픔을 어떻게 꼭꼭 씹어 소화해서 배출해야 하는지 몰랐다. 슬프거나 우울하면 모든 것을 남들에게 말했다. 모든 문제는 결국 다 내가 혼자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인데 잠깐의 외로움과 우울함을 잊고자 타인에게 곧이 곧 대로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것이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내던 친구에게 나의 감정이나 고민들을 다 말했다. 그 친구는 참다못해 나에게 그만하라고 말했다. 너무 큰 충격이었다. 서운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매일 엄마한테도 학교가 너무 힘들다고 전화했다. 어느 날은 동생이 내게 말해주었다. “엄마가 언니 전화받기 싫대. 전화하면 하는 얘기가 다 힘들다 투정이라고.” 가슴이 정말 무너져 내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버림받은 것처럼 철저하게 혼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 뒤로 나는 아무에게도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힘들어도 어떻게든 혼자 삼키자.’   

   

 지금은 그때의 내 슬픔 소화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정말 잘 알고 있다. 나에게 그만하라고 말했던 친구가 이제는 정말 이해된다. 전화받기 싫다고 했던 엄마도 이해된다. 힘들게 살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과도하게 어리광을 부렸다. 또 그때의 내 감정의 수준은 거의 우울증 증세와 같았다. 총상을 입은 사람을 일반인이 구급 박스로 살려내기 힘들 듯이 그들이 나를 감당하기에는 내가 입은 정신적 상처의 깊이가 너무 깊었었다. 우울은 쉽게 전염된다. 나 때문에 남들의 하루도 부정적인 하루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한 친구와 함께 학교 산책길을 걸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내 고민들을 마음껏 털어내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내 고민을 듣는 것이 좋다고 해주었다. 지금은 그 마음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안다. 다시 보게 된다면 더듬거리겠지만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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