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자연스럽게 외국어 고등학교를 준비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와 같이 일본 로맨스 영화를 많이 봤는데 사카구치 켄타로라는 일본 배우에 빠져 있었다. 당시에 SNS에서 서강준 닮은꼴로 유명했다. 순진하게 진짜 일본어 통역사가 돼서 사카구치 켄타로를 만나고 싶었다. 외고가 입시 전쟁터인 걸 몰랐던 나는 일본어가 배우고 싶어서 외고에 가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외고 입학을 준비했는데 특별히 뭘 한 건 없다. 영어 시험만 잘 보면 돼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영어 시험을 잘 보는 건 힘들었다. 우리 학교 영어 시험이 정말 어려웠다. 역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과정은 정말 치열했다.
다음 글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쓴 글이다. ‘돌다리’라는 소설을 읽고 부모님과의 갈등 경험을 글로 쓰는 활동을 했다. 친구들이 내 글을 읽고 울어주었다. 평생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발표 스티커가 많아야 수행평가 점수가 깎이지 않았었는데 당시 내 발표 스티커는 턱 없이 부족했었다. 이 글을 발표해야 수행평가 점수가 간당간당하게 통과였다. 내 사정을 고려해서 발표 기회를 양보해준 친구에게 고맙다.
때는 중학교 입시였다. 난 항상 회고 입시 준비로 예민했고 점수가 합산되는 마지막 영어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난 그때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해 봤다. 시험을 앞두었지만 근처 여고에서 영어 경시대회를 한다고 해, 경시대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학교 시험 3일 전이었던 경시대회 날에 부모님이 차로 고등학교까지 태워주신다고 하여 계속 먹고 싶었던 빵을 먹다가 아까워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고 달려 나갔다. 시험장에 가니 가을인데도 에어컨을 아주 시원하게 틀어주셔서 몸이 살짝 안 좋았다. 그러다 시험 후반이 되니 허겁지겁 먹었던 빵 때문인지 정말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는 나 혼자 가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거울을 살짝 봤더니 얼굴이 술 마신 사람처럼 시뻘겠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걸어가다가 이대로 더 걷다가 진짜 죽겠다 싶어서 울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다행히 집 근처여서 나를 데리고 집에 갔다. 집에서는 그냥 앓아누웠다. 평소에는 아파서 학교에 안 가고 싶었는데 정말 학교에 가면 감사할 지경이었다. 다음 날에 급히 병원에 가보니 독감과 장염에 걸렸다고 했다. 태어나서 장염은 처음 걸려 봤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 장염이 걸렸다. 그랬다. 링거를 하루 종일 맞았다. 그랬다. 영어공부는 뭐 그냥 거의 안 했다. 시험 날이 왔다. 쉬는 시간까지 최종적으로 공부한 걸 정리했다. 시험을 보는데 아리까리한 문제가 있었다. s를 붙일까 말까 고민했다. 안 붙이고 냈다. 틀렸다. 4점이 날아갔다. 왜 그 어려운 paralympic은 쓰고 s를 안 붙였는지 모르겠다. 매일 밤마다 울었다. s 한 글자를 안 붙였고 틀렸고 4점이 날아갔고 1등급 컷 97점에서 1점이 모자라 2등급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시제, 수 일치에서 부분점수를 받았는데 난 그냥 통으로 깎여서 정말 억울했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선생님이셨던 3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영어 선생님한테 적극적으로 따져보라고 했다. 그러다 정 안 되면 부모님이 항의를 넣게 하면 너의 말을 가볍게 흘려듣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절대 내 답이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수학시험을 다른 학생의 부모님의 항의로 재시험을 봤을 때 내가 짜증 난 것이 떠올라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교무실을 지나가다 내가 틀린 문제로 영어 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회의하는 것을 들었다. 바로 엄마한테 전화를 했더니 담임선생님이 영어 선생님들이 내 말을 듣고 흘리는 것 같다고 항의를 하라고 하셔서 항의를 했다고 말했다. 내가 전에 이런 상황을 욕했던 것과 내 답이 틀리는 이유를 떠올리니 짜증과 분노가 치밀었다. 그날 엄마랑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냐고 밤새워 싸웠다. 학교 일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했던 나와 내가 걱정이 되었던 엄마가 정말 계속 싸웠다. 영어 시험에 대해서 회의가 끝나고 끝내 내 답은 오답처리가 되었다. 오히려 후련했다. 1등급, 2등급이었던 상황에서 외고를 준비했다. 싸움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한테 미안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팠을 때는 내 옆에서 정말 평생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로 간호해줬고 2등급이 돼서 밤 새 우는 나를 지켜봐 주셨다. 일하는 엄마에게 왜 이렇게 정보도 없고 학교 입학에 관심이 없냐고 짜증 냈을 때에도 다음 날엔 무언가 들고 와 주셨다. 엄마에겐 아직 나는 덜 큰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