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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안 Sep 21. 2022

친절은 가로수 밑 그늘과 같아서

친절 별 거 없어요

요 근래 피로가 꽤나 쌓인 탓인지 코 옆에 왕 여드름, 일명 화농성 여드름이 며칠째 가라앉지 않고 빨갛게 자리 잡고 있었다.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 알아서 가라앉길 바랐지만,

그 바람이 통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길래 결국 회사 앞 피부과에 방문했다.


눈물 나게 따가운 염증 주사를 맞은 뒤,

병원에서 쥐어 준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들어갔다.



마스크 너머에서도 느껴질 만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약사님을 마주했다.


처방전을 받으시곤

약사 : "평소에 위 어떠세요? 좋아요?"

나 : "음 안 좋아요"

약사 : "자, 그럼 이건 위가 약하시니까 식사 후에 드시고,..."


라는 말을 시작으로 복용 주의사항을 계속 말씀해주셨다.

혹여 듣는 내가 놓칠세라 꼼꼼하게 약 봉투에 주의사항을 적어가며 눈높이 설명을 해주셨는데

참 적잖은 감동을 받아버렸다.


미량의 항생제가 든 알약이며, 꼭 따뜻한 물 1~2컵과 함께 복용하고 눕지 마라.

간혹 예민하신 분들은 약이 내려가지 않아 속 쓰림을 호소하시는 경우도 있더라.

그리고 딱 한 명 보긴 했지만 햇빛 알레르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선크림 꼭 발라줘라 근데 실내 근무면 괜찮을 거다.

회식 같은 게 있어 술을 마셔야 한다면 그날은 그냥 약을 먹지 말거나 약 먹으니까 건들지 말라고 말해라.

그리고 염증성 질환이니 기름진 건 먹지 말고 담백하게 드셔라.

그리고 위가 안 좋으면 양배추 잘 챙겨 먹어라.



내 평생 약국에서 이렇게 긴 설명을 들어본 적이 있었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약국을 나오면서 약 봉투를 다시금 들어 읽어보았다.



겨우 콩알만 한 여드름 하나에 진료비는 3만 원 약값은 4만 원이 나왔다.

말이 됩니까



매직으로 잔뜩 설명이 적힌 약봉투를 다시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아마 다른 환자들에게도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말씀해주셨겠지.

끝까지 내색 않고 설명해주시던 걸 떠올리니 그냥 좋았다.


누구는 당연한 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지금 내 앞의 상대가 나를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모두 느낄 수 있지 않나.


친절 참 별 거 없다.

굳이 나를 위해 조금 움직여주는 것

그게 참 소소한 감동이고 친절인 듯하다.





지금보다 좀 더 어릴 때 하드 클레임 대표 책임자로 일했던 적이 있었다.


핵심 업무 중 하나는 다른 팀장들 선에서도 해결 안 되는 고객을 전담하는 것이었다.

배정을 받으면 그동안의 클레임 기록들이나 고객 성향을 전달 받게 되는데,

분명 내용만으로는 이 고객이 정말 말도 안되는 진상에 성격이 별로라느니 하는 내용이 있어 비장하게 전화를 걸어 얘기를 나누어 보면, 막상 그런 고객이 아닌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클레임 고객이라는 프레임을 걷고 사람 대 사람으로 얘기를 나누며 타임라인과 문제를 정리하다 보면,

그냥 원래 말투가 상대적으로 톡톡 쏘거나 공격적으로 느껴질 여지가 조금 존재할  이 사람 말 속의 진심이나 의미는 그만큼 뾰족하고 가시 돋쳐있지 않다는  금방   있다.

(물론~ 정말 못된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람을 파악할 때 말투나 단어 억양만을 보진 않고 표현 방식을 느끼려고 하는 것 같다.

무뚝뚝하고 사나워 보이는 사람들도 가만히 보다 보면 나쁘지 않은 사람이다 싶을 때가 있다.

(예의 없는 건 다른 얘기)


종종 고객들은 나와 얘기를 나눈 후,

내가 본인의 요구사항을 맞춰주지 못했음에도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식의 말을 건네주곤 했다.



정말 친절 참 별 거 없다.

상호 간의 충분한 존중만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친절해질 수 있다.


모두가 약간의 존중만 더 갖고 있다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수도 있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파란불 기다리며 잠시 숨 돌릴 수 있는 정도의

뙤약볕 속 가로수 그늘처럼



친절 가득 담긴 약봉투 하나에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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