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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준의 공직자 인생설계 #1】 색으로 나눈 복지

색으로 나눈 복지, 디테일로 지킨 존엄 – 공급자 중심 행정의 한계와 대

"나는 왜 초록색 카드인가요?" 지난겨울, 광주의 한 복지 수급자가 민원창구에서 조용히 던진 질문이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지인은 분홍색, 누군가는 남색, 본인은 초록색. 사람마다 색깔이 달랐고, 문제는 그 색이 ‘복지급여의 종류와 수준’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동네 마트 직원까지 안다는 점이었다. 지자체의 배려였을까, 아니면 설계자의 실수였을까. '디자인은 디테일'이라는 말은 공공행정에 있어 곧 '존엄의 문제'가 된다.


최근 부산시와 광주시가 시행한 소비쿠폰 정책은 ‘디자인’ 하나로 정책의 진정성이 논란에 휩싸인 대표 사례다. 두 지자체 모두 복지대상자에게 선불카드를 지급했는데, 광주시는 수급자 유형에 따라 분홍색, 연두색, 남색으로 카드 색상을 구분했다. 문제는 이 색상이 곧 수급 자격을 드러내며, 누군가는 “노인카드”, 다른 이는 “기초생활자 카드”라 불리는 등 카드 한 장이 신분을 상징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본래 효율을 위한 구분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수혜자 간 낙인효과를 초래했다.

삶의 다음 단계를 진지하게 설계하는 중년 남성의 집중된 모습.png 삶의 다음 단계를 진지하게 설계하는 중년 남성의 집중된 모습 / 김한준 DALE.E.


이는 공급자 중심 행정이 만들어낸 전형적 문제다. 정책 설계에서 사용자(수혜자)의 경험은 고려되지 않았고, ‘배포와 관리의 편의성’이 우선시됐다. 행정이 복지 대상을 유형화할 때, 그 구분은 내부 코드에만 머물러야 한다. 외부에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정보가 아니라 신분을 상징하게 된다. 복지가 품위 있게 다가가려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선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공공복지에서 ‘디자인’은 단지 시각적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기능이고, 감정이며, 인식이다. 해외 사례를 보면 이 점이 더 분명해진다. 핀란드는 기초생활보장 실험 당시 지급 수단을 일반 직불카드와 구분되지 않도록 설계했으며, 미국 일부 주는 푸드스탬프 프로그램(Electronic Benefit Transfer)에서도 수령자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일반화된 디자인’을 고수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다른 색상’, ‘크게 쓰인 기관명’, ‘분명한 용도 표시’ 등으로 복지 대상자를 사회적으로 구분 짓는 설계를 자주 반복한다.


문제는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배려의 감각’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공공조달체계는 이미 다양한 형태의 통합 카드를 제작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다. 일부 지자체는 색상을 통일하고 차별적 디자인 요소를 제거한 복지카드를 시범 적용한 바 있다. 그런데도 왜 여전히 ‘구분되는 카드’가 나오는가.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공공행정에서 사용자는 수동적 존재’라는 오래된 전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급자 중심 행정은 디지털 시대에도 반복된다. 복지 앱의 접근성이 낮고, 장애인용 플랫폼은 시력장애인 위주로 설계되며, 행정복지센터의 게시물조차 이해하기 어렵게 제작되는 이유도 같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이라면 설계 초기부터 그들의 시선으로 접근해야 하지만, 현실은 수혜자의 의견을 사후 설문으로만 수렴하고 있다.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모든 복지 수단(카드, 앱, 증서 등)의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통합하고, ‘시각적 평등성’이라는 원칙을 명문화해야 한다. 이는 문화체육관광부의 공공디자인 진흥법과도 연계될 수 있으며, 실제로 2024년부터 일부 중앙부처는 공공시각정보 통합지침을 시범 도입 중이다. 둘째, 정책 설계 단계에서 수혜자 대표의 참여를 의무화하고, 사전 시제품 테스트(Pilot UX Test)를 거치는 제도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셋째,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공공복지 UX 리뷰단’을 구성하여 정책 효과를 수혜자의 관점에서 진단하는 메커니즘을 도입해야 한다.


디테일은 행정의 윤리다. 작은 실수 하나가 존엄을 해치고, 카드 한 장이 사람을 낙인찍는다. 복지란 생계 보장에만 그쳐선 안 되며, 체면과 자존감, 사회적 관계까지 보듬어야 한다. ‘색’은 눈에 띄는 만큼, 그로 인해 사라지는 것도 많다. 존엄한 복지는 티 나지 않는 배려에서 시작된다. "한 사람을 위한 디자인은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다"라는 말처럼, 정책의 윤리는 종종 눈에 보이지 않는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인생3모작 전문가】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LH인재개발원 미래설계지원센터장, 국토교통인재개발원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개인 메일 charly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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