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은 정체성의 해체가 아니라 전환이다
“여보, 어디 가세요?”
“출근은 아니고, 오늘은 재능기부하러 노인복지관에 가요.”
“근데 당신, 은퇴도 했는데 좀 쉬면 안 돼요?”
“퇴직은 했지만, 은퇴는 내가 정하는 거죠.”
부부의 짧은 대화 속에는 오늘날 신중년이 마주한 현실과 태도의 간극이 담겨 있다. 많은 이들이 퇴직과 은퇴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인생의 한 국면을 섣불리 닫는 관점이다. 퇴직은 제도적 이행이고, 은퇴는 정체성의 재구성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준비와 사회적 연결의 문제이기도 하다.
2024년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평균 퇴직 연령은 남성 54.7세, 여성 50.9세로 전체 평균은 52.8세다. 같은 해 기대수명은 83.8세(남성 80.9세, 여성 86.5세)였으며, 특히 60세 기준 기대여명은 남성 22.7년, 여성 27.4년으로 집계됐다. 이는 퇴직 이후에도 최소 25년 이상의 삶이 남는다는 뜻이며, 단지 여가나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과 목적을 갖는 생애 주기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고용노동부의 「2024년 신중년 노동시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신중년의 58.4%는 퇴직 이후 제 2직업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고, 주요 이유로는 ‘정보 부족’(38.6%)과 ‘체력 및 자신감 부족’(27.3%)을 들었다. 이는 개인의 의지 문제라기보다, 제도적 정보의 단절과 기회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삶의 궤도는 단순한 반복이 아닌 재조정이며, 새로운 길은 특별한 전환이 아닌 익숙한 경험의 다른 쓰임에서 시작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끝은 새로운 시작의 문이다”라고 했다. 퇴직이라는 '끝' 앞에 선 신중년에게 이 말은 곧 새로운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다행히 제도는 서서히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고용노동부의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은 신중년의 경력을 사회적 가치로 전환하는 모델로 주목받는다. 2025년 현재 약 13,000여 명이 지역사회 행정지원, 복지시설 보조, 상담·교육 등 분야에서 활동 중이며, 월 66시간 이내의 근로시간과 공공서비스 중심의 역할은 ‘생애 2막’의 공공성과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설계하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기회가 존재한다고 해도 선택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신중년들은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쓰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망설인다. 특히 퇴직 이후 자신을 노동시장 바깥의 존재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고, 이로 인해 사회적 고립감이나 우울, 정체성 혼란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퇴직자의 경우, 생애설계 지원이나 재취업 연계 프로그램의 접근성이 대기업이나 공직 출신에 비해 현저히 낮다. 이는 단순한 정보 불균형이 아니라, 국가가 보유한 ‘경험 자산’을 방치하는 구조적 낭비이자 정책적 책임의 회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방향을 다시 설정한 이들이 있다. 전직 간호사는 지역 주민센터에서 노년기 상담을 돕고 있고, 은퇴한 기자는 마을 평생학습관에서 글쓰기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스마트폰 교육을 통해 디지털 소외 해소에 기여하는 전직 공무원도 있다. 이들의 활동은 단지 직업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새로운 배치’를 의미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행위는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라고 말했다. 신중년에게도 단절이 아닌 행위의 지속이 필요하다. 그것은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 의미의 재발견이며 존재의 확장이다.
퇴직은 더 이상 멈춤이 아니다. 오히려 배열이다.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조명을 옮겨 또 다른 자리를 밝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무대에 서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역할로 서 있는가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단지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떠받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인생3모작 전문가】는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로, LH인재개발원 미래설계지원센터장, 국토교통인재개발원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개인 메일 charly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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