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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준의 신중년 인생 3모작] 사람이 곧 거울이다

– “퇴직 후 삶의 품격은 자산이 아니라 함께 비춰주는 벗에서 나온다”


“혼자 있을 때는 내 모습이 잘 보이지 않지만, 벗 앞에 서면 나의 장단이 선명해진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은 제자와 벗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추며 살았다. 그는 홀로 탐구에 머물지 않고 토론과 서신을 통해 제자의 의견을 경청했으며, 때로는 잘못된 길을 걷는 후학에게 꾸짖음을 아끼지 않았다. 『퇴계집』에 남은 편지들에는 “벗의 충언이 곧 나의 거울이다”라는 태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학문과 삶을 함께 가꾸는 이 교류의 정신은 오늘날 퇴직 후 신중년이 관계 자산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뚜렷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퇴직 이후 많은 이들이 연금과 저축을 먼저 떠올리지만, 실제로 삶의 균형을 지탱하는 것은 곁에서 나를 비추어 주는 사람들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2024)의 조사에서도 65세 이상 노인의 행복도는 소득보다 정기적 모임과 사회활동 참여 여부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분석됐다. 경제적 자산이 생활의 안정을 담보한다면, 관계 자산은 삶의 의미를 불어넣는다. 결국 신중년 인생 3모작의 품격은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느냐”에서 갈린다.


퇴계가 제자들과 나눈 교류는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 학문적·도덕적 성장의 장치였다. 학문적 질문은 곧 삶을 단련하는 자극이 되었고, 벗의 충언은 자신의 태도를 교정하는 거울이 되었다. 오늘의 신중년 역시 동호회, 평생학습, 자원봉사 활동을 단순한 취미로 여기지 말고 자기 점검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함께 걷는 벗은 보폭을 일정하게 하고, 함께 배우는 동료는 사고의 폭을 넓히며, 함께 돕는 친구는 삶의 가치를 배가시킨다. 이처럼 타인은 단순한 동행자가 아니라 나를 조율하고 성장시키는 살아 있는 거울이다.


문제는 퇴직과 동시에 관계의 거울이 깨지기 쉽다는 점이다. 직장에서의 회의나 대화는 때로는 피로했지만, 동시에 하루의 리듬을 만들고 역할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거울이 사라질 때 많은 이들이 자신이 보이지 않는 듯한 공허함을 경험한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2025)의 보고서에 따르면, 정기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신중년이 사회적 고립 위험이 두 배 이상 높고, 우울감 지표도 뚜렷이 상승한다고 밝힌다. 이는 관계 자산이 단절되면 재정적 자산만으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생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신중년에게 관계의 핵심은 화려한 인맥이 아니라 신뢰와 진정성이다. 『명심보감』은 “교우이신(交友以信)”이라 하여 벗을 믿음으로 사귀라고 했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습관, 타인의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 정보를 독점하지 않고 나누는 마음은 관계의 이자처럼 쌓인다. 그리고 퇴계의 말처럼, 불편한 조언을 회피하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바로잡는 태도가 필요하다. 예컨대 동호회에서 무임승차가 반복된다면 이를 지적할 용기를 내고, 가까운 지인의 건강을 위해 생활 습관을 바꾸도록 권하는 태도는 충언을 행동으로 옮긴 현대적 실천이다. 관계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교정이 될 때 더욱 깊어진다.


관계 자산은 단순한 위로나 위안의 차원을 넘어 삶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한다. 최근 국내 연구에 따르면 신중년이 멘토링이나 봉사 활동에 참여할 경우 삶의 만족도가 1.5배 이상 높아지고, 고독감은 현저히 줄어든다. 이는 관계 자산이 정신적 건강과 사회적 존엄을 동시에 지켜주는 핵심 자원임을 보여준다. 결국 퇴직 후 삶의 품격은 자산이 아니라 벗에게서 나온다.


퇴직은 홀로 서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벗을 통해 다시 자신을 비추는 과정이다. 신중년 인생 3모작의 품격은 재정적 준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웃고 배우고 돕는 관계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충언을 실천으로 옮기는 용기 속에서 품격은 드러난다. 그러므로 오늘의 거울을 잃지 말고, 또 다른 거울을 곁에 세우라. 그것이 신중년이 후반전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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