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이민자다
심리학에는 Third Culture Kids라는 단어가 있다. 다른 말로는 CCK, Cross Culture Kids. 성장기 동안 2개 이상의 문화적 배경을 경험하며 자란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인데, 나는 이민 1.5세대로서 이 범주에 속한다. 완전한 한국인인 부모님 아래에서 어럴 적 이민을 온 것은 혜택이 될 수도 있겠지만, 비참하기도 했다.
이 단어가 나를 온전히 표현한다고 느꼈다. 초등학생 시절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부모님께 이끌려 비행기를 탄 한국의 문화에 더 익숙하고, 영어보다는 한국어에 능숙하지만 10대의 대부분을 캐나다에서 보낸 사람. 하지만 온전한 한국인이라기엔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TCK라는 세 글자짜리 단어는 나의 이 외로움을 정당하다고 말해주는 듯 했다.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단어나 다름없었다.
‘조기 유학’, ‘조기 이민자’라는 단어에는 따라붙는 기대가 있다. 와, 그럼 영어 잘 하겠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릴 때 이민을 가면 영어를 잘 하고, 모든 반응은 ‘Oh, Come on!’과 같이 영어로 하며, 미국 영화 정도는 자막 없이 보는 것이 당연한 일. 내가 나 자신을 캐나다에서 살다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면, 이어지는 대화에서는 그럼 너는 영어가 모국어보다 더 익숙한 사람이겠네. 라는 기대와 약간의 부러움이 느껴진다.
아뇨, 저 영어 못 해요.
영어를 들을 수는 있지만 유창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한국 청소년의 영어 실력에 대한 지표가 되어주는 영어 모의고사는 2등급을 받는다. 나쁘지는 않지만 외국에서 몇 년을 살다 온 사람이 받기에는 한참 모자란 점수다. 나는 실패한 이민자다.
캐나다에 와서 공황 장애와 우울증이 생겼으며 흔히 말하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다. 인터넷 의존증까지. 기대에 차서 자녀와 한 가정을 짊어지고 이민을 결정한 부모님에게는 부끄러운 삶이다.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학교에 앉아만 있다 오고, 스마트폰 스크린타임은 점점 늘었으며, 영어 원서보다는 한국 소설을 더욱 좋아했다. 현실 도피의 목적으로 책을 읽은 것도 있었다. 어떻게든 책을 읽었다. 부모님의 책장에 꽂힌 소설들을 몇 번이고 읽었고, 아는 이야기라도 습관적으로 책을 펴곤 했다. 그 영향인지 글을 쓰는 재주가 생겼다. 누군가가 무엇에 재능이 있냐고 물으면 그나마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였으니까. 하지만, 외국에 나온 딸이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이 좋으니 문창과에 가고싶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어머니는 어떤 심정이셨을까.
사실 나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학생을 동경했다. 우스운 일이다. 모두가 '탈조선'을 꿈꾸고, 해외 유학과 이민이라면 부러워 하는 사회에서 평범한 국내파 고등학생을 부러워하다니. 어쩌면 기만이라고 불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한국인이다. TCK가 아니라면 그 배척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애써 비유를 하자면, 군필자들의 "나는 군대에서 이렇게 힘들었다. 다시는 안 가!"식 대화에 낀 군미필자의 마음과 비슷할 터다. 고통스러운 경험 또한 일반적이라면 대화의 주제가 된다. 흔히 말하는 고3 시절의 광기, 수능 직후의 해방감, 학창 시절 시험기간에 친구와 밤을 샌 이야기. 나는 그런 것들을 동경하곤 했다. 정확히는 SNS와 웹툰, 드라마를 통해서만 배운 ‘친구와 함께 스터디 카페 가기’, ‘마라탕 먹기’ 등을 부러워 했다. 학생이라면 그토록 싫어하는 모의고사나 시험 기간까지도 동경했다. 그것이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살지 못한 내가 믿던 ‘정상적인 삶의 궤도’ 중 하나였고, 청춘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아직도 그것이 부럽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 나 자신을 타자화하고,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꼴인지는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을 시기하는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