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봐야 아는 톨레도
벌써 헤매기를 1시간 반 째다. 한국의 4월과는 전혀 다른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은 이글거리며 온 도시를 내리쬔다. 휴대폰은 진작 먹통에 흔하디 흔한 공공 와이파이마저 없다. 아니, 관광객들이 이렇게나 찾는 대도시면 당연히 있어야하는거 아냐? 나처럼 갑자기 데이터가 안되는 경우엔 대체 어쩌란말이야. 머릿속은 이미 길찾기보단 불평 쏟아내기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있다. 너무 지친탓에 아무 벤치에 몸을 풀썩 맡긴 후 메모장을 켠다. 눈은 멍하니 풀린채 엄지손가락만 헛하게 움직이며 써내려가는 잠깐의 기록. ‘이런 최악의 상황에도 과연 내가 이 곳을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이 답답함에 대해 어떤 감사를 느낄 수 있을까?’
몇 분이 지났을까. 어찌됐든 선택지는 두개고 뭐가 됐든 일어서긴 해야한다. 계속 가느냐 돌아가느냐. 마음안에는 태양열만큼이나 강력하게 돌아가고싶단 생각으로 가득차있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시험과 도전을 멈추고 싶지 않다는 딱 1퍼센트가 저기 구석에 웅크려있는게 보인다. 포기할것인가. 눈 질끈 감고 발걸음을 뗀다. 하지만 내가 옳은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쯤하고 숙소로 돌아가 쉬어도 된다.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을것이며 나는 누가 뭐래도 최고의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는 오기가 참 무섭다. 되든 안되든 일단은 가본다.
하필 스페인 최대 공휴일 중 하나인 부활절과 겹쳐 기차역엔 사람이 콩나물 시루마냥 바글댄다. 총 세 번의 환승을 해야하고 1시간이면 될 거리를 무려 세시간에 걸쳐 돌아 돌아 찾아왔지만 과연 끝까지 말썽이다. 타야하는 기차 티켓은 이미 매진. 머리가 핑 돌았지만 이내 무섭도록 정신을 바짝 차린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다시 왔던길을 얼만큼 돌아가서 버스터미널을 향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했던가. 기차가 없으면 버스를 타야지. 들어가든 안되든 던져는 보는거다. 그렇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핸드폰은 가방에 넣어두고 정말 옛날방식으로 찾아간다. 한 사람 붙잡고 물어보고 다음 사람 붙잡고 한번 더 확인하기.
그렇게 수차례 물어 찾아 온 버스 터미널도 만석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말 운좋게도 딱 한 좌석 내가 뉘일곳이 있다. 하룻동안 처음 느껴지는 다행과 감사의 기분을 만끽한다. 40분 정도를 달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며, 한참을 찾아헤맨 도착지에 발을 내린다. 스페인 톨레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가 살아숨쉬는 도시. 아, 이 얼마나 반가운가. 일단 정말 말그대로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아무 메뉴나 시켰다. 지금 당장 내 목을 축일 오렌지주스와 함께. 체감상 3일은 써야하는 에너지를 지난 세시간동안 다 쏟아낸 것 같다.
정신없이 배를 채우고 나와 이 곳을 온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옮긴다. 바로 톨레도 관광열차. 톨레도는 가까이서 보는 것 보다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고, 그 매력을 더 알게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각자의 양식대로 지은 건물들이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볼 수있기 때문이다. 분홍색으로 덮힌 미니 열차에 앉아 창문을 활짝 열고 덜컹거림마저 이제는 즐거움으로 쾌활하게 받아들인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 모난 길이야 어쨌든 나는 여기에 도착했으니까.
음식은 배가 고파야 맛있고 관계는 오랜 시간 거쳐야 깊어가고 여행은 고생을 해야 기억에 남나보다. 지쳐서 한 발자국도 더는 못움직일것 같았는데 눈앞에 펼쳐진 환상적인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 가슴이 설렌다. 이게 바로 성취의 맛인가 보다. 오늘은 정말 고생 좀 했다. 스스로 힘껏 다독이며 이 기분을 은근히 오래 가져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