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엄마, 아버지, 형을 제외하고 내가 좋아하다 못해 나의 본보기로 삼았던 한 분이 있다. 다름 아닌 우리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와의 기억은 나에게 소중했고 좋았던 기억으로 가득했다. 아버지가 우스갯소리로 “너는 엄마, 아빠보다 ‘할바’라고 먼저 말을 뗐다”라고 하셨을 정도다. 그만큼 할아버지는 나에게 나는 할아버지께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의 증언으로 할아버지께서도 나를 굉장히 아끼셨다고 한다. 나를 보러 자주 오시고, 어디든지 가는 곳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중 웃긴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 세 살 적 한가윗날 5촌, 8촌의 4촌까지 모인 한마당에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닮은 친척 어르신이 나란히 앉아게셨는데 내가 할아버지를 닮은 친척 어르신께 할아버지인 줄 착각하고 와락 안겼었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가 아님을 알고는 집이 떠나가라 서러워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정말 웃기 동시에 그렇게도 할아버지가 좋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6살이 되자 피자 두 판을 사주셨고, 한자를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세상에 담긴 지혜를 누구보다도 자상하게 알려 주셨다. 그리고 새해가 되어 새배 할 때면 누구보다 더 자상하신 모습으로 내 손을 잡아주시며 황금 같은 덕담도 남기셨다. 그래서 내가 어릴 적에 할머니 댁에 가고 싶었던 이유가 할아버지 품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음이라….
주로 내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은 “공부 열심히 해라”였다. 할아버지께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씀은 결코 나에게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왠지 그 말을 할아버지한테서 들으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할 것 같은 오기가 생겼다. 학교 담임선생님이 공부 하라는 허울 같은 잔소리와는 똑같은 말임에도 그 격이 달랐다. 그기고 할아버지께서 날 지켜보고 계신다는 동기부여도 되었다.
그때 까지만 하더라도 할아버지께서는 쩌렁쩌렁하셨고, 그 높다던 동서대 경사로를 맨몸으로 뛰어다니셨던 아주 총명하셨던 동시에 자상하신 분이었다.그러셨던 할아버지에게 불행한 전운이 덮쳐왔다. 11년 전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동서대에서 화분에 물을 주시다가 그만 계단에 굴러 넘어지셨다. 자칫하면 돌아가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총명하셨던 우리 할아버지를 다시는 뵐 수 없다는 생각에 잠겨 눈물이 났다. 다행이도 할아버지는 기적처럼 살아나셨다. 비록 할아버지의 상태가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해 추석날 퇴원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은 사고나기 이전의 모습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총명함을 예전보다는 아니지만 되찾으셨고, 예전처럼 나에게 덕담과 용돈을 쥐어주셨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동서대에 경비원으로 출근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런 사고를 당하시고도 여전히 총명하신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신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고 좋았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께서 150세까지 살아계셨으면 하는 것이 할아버지에 대한 소원이었다. 그러고 나와 할아버지는 새해 때마다 안부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총명하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치매가 찾아온 것이다. 며칠동안 아무것도 드시질 않으시더니 덜컥 치매가 스며든 것이다. 나는 또다시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만 같았다. 눈물도 났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이렇게 되다니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한동안은 꼭 그래야만 했다. 한동안 나의 마음 속 할아버지의 모습은 쩌렁쩌렁하고 총명하시던, 가파른 동서대의 언덕길을 빠르게 뛰어오르시던 모습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치매가 걸린 뒤로도 꿈에서만큼은 총명하시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나셨다.
비록 지금은 나를 못 알아보실 때가 많아 슬프고 힘이들고 조금은 서운해도 그래도 할아버지는 내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다. 다른 어르신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자상하고 자애로운 푸근함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심지어 나는 할아버지가 피우시던 구름과자의 냄새까지 좋아했다.
지금은 할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고 있어 예전의 총명하시던 모습을 볼 수 없고, 용돈도 예전같이 주시지는 않지만, 할머니 댁에 가면 주무시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예전에 총명하셨던 그시절로 돌아가 나에게 다양한 덕담과 용돈을 쥐어 주셨던 모습을 떠올린다.그 생각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할아버지께서 깨어나 할머니에게“밥 줘”라고 하는 것을 듣고 현실을 자각한다. 참 슬프다….
그러나 단지 치매라는 병이 할아버지를 덮쳐왔을 뿐, 여전히 나의 할아버지인건 분명하다.
여전히 우리식구는 제외하고 나의 친척 1순위는 영원토록 할아바지다.
이제 할아버지는 완전히 어린 애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매 증상이 심각하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때문에 녹초가 되셨다. 이제는 할머니의 건강도 심히 우려스럽다. 할아버지를 요양하다가 할머니마저 안 좋게 된다면 그땐 정말로 우리 식구들이 힘들다. 요즘은 큰아버지, 고모, 아버지 사이에서 이제는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셔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올 정도이다.
나는 할아버지를 오랫동안 보고 싶어서라도 요양원에 모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식구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면 할아버지의 치매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눈물을 꾹 참고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드려야 서로에게 짐을 덜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이런 글을 쓸 때면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 그의 할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이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계시기에 너무나도 행복하고 다행스럽다. 참고로 엄마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치매 어르신은 다른, 건강한 사람에 비해서 오래 산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할아버지께서 오래오래 장수하실 것만 같았다. 물론 치매를 안은 채로,
지금도 나는 할아버지께서 150세는 아니더라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