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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기 Mar 18. 2023

저한테는 부적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40일간의 글쓰기>

저한테는 마치 '부적'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 부적은 나무로 깎은 화병입니다. 그것은 어머니와 늘 함께 다니던 전통 목기점 주인이, 어머니를 여읜 저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름난 장인의 솜씨로 빚은 것을 주신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모양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나무색,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 이 화병은 마치 목이 긴 조선 백자 술병을 닮았습니다. 넉넉하게 떠오르는 보름달 같이 풍요로운 몸통이 봉긋 부풀은 여인의 치마폭 같기도 한데, 간절한 기다림이 솟구친 꽃대인 양 뻗어 난 화병의 모가지는 가늘고 길어서 아득했습니다. 그 둥글고 어진 몸에는, 속 깊은 곳으로부터 은은히 배어나 비치는 온갖 무늬가 흡사 탈속의 동양화 마냥 어리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나무의 이름도 모릅니다만, 이 화병의 재료가 된 나무는, 저 숲 속에 우렁찬 아름드리 몇십 년생 나무였다고 합니다. 청천 하늘 아래 거칠 것 없이 커 오르던 이 나무는 어느 하루, 영문도 모르면서 무참히도 나무 깎는 장인의 도낏날에 여지없이 찍히어 잘린 뒤, 그것만으로는 불행이 모자라서 다시 토막, 토막, 여남은 토막으로 잘린답니다.


죄 없이 자기의 토양에서 잘 자라던 나무가 느닷없이 밑둥을 잃고, 또 토막 쳐질 때, 만일 나무가 생각이 있다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또 이것을 사람마다 겪는 자신의 경험이나 인생이라 생각한다면, 또 조국의 역사나 시대의 아픔 같은 것으로 환치시켜 본다면, 이 수난과 핍박과 좌절과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외부, 혹은 운명의 도낏날에 허리가 찍힌 나무토막들. 그런데 이 나무의 참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장인은 이 열 토막 난 나무토막들을 시궁창에 처박습니다. 순결한 나무가 운명에 폭행당한 것이지요. 생의 모욕. 그리고 처박은 사람은 석삼년을 잊어버립니다.


그 시궁창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 아닙니까? 온갖 하수물과 쓰레기가 썩고 있는 시푸르둥둥한 시궁창 속에는 실지렁이 뭉텅이 살고, 부글부글 끓어서 숨도 쉴 수 없지요. 늪처럼 고여 썩어가는 시궁창 그 천하고 더러운 밑바닥에 처박힌 생나무토막은 뜨겁게 들끓는 석삼년 세월을 그냥 속수무책 썩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삼 년이 지나면 장인은 그것들을 건져 올리지요. 허나 열에 아홉은 대개 참으로 썩어 버리고, 요행이도 한 토막 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그야말로 보물 단지, 그 어떤 금덩어리와도 바꾸지 않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온전한 것이 아니라 살점이 떨어져 나가 뭉그러진 고갱이 한 토막이지만, 이 세상의 무엇보다 소중한 귀물로 소중히 보듬어 올린 이 나무토막을 이제는 흐르는 냇물에 석 달 열흘 동안 담그어 놓습니다. 시궁창에서 건져 올린 냄새도 씻어내고, 마지막 원한처럼 썩어 부스러지는 나뭇결도 저절로 다 떨어져 씻겨 내려가게 하는 것이지요. 실핏줄까지 깊이 밴 시궁창의 세월을 씻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져낸 나무토막을 이제 처마 밑 그늘에서 말립니다. 그것도 석 달 열흘. 그동안 네가 얼마나 억울했느냐, 얼마나 서러웠느냐, 얼마나 답답하고 어두웠느냐, 죄도 없이 썩느라고 얼마나 애썼느냐, 해서 모든 세월 갚아주느라고 찬란한 햇볕에 내세워 보란 듯이 바짝 말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그늘진 자리에 버려지듯 매달린 나무토막은, 저절로 바람 불고, 저절로 이슬 내리는 시간이 삭아 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른 나무토막은 이제 드디어 돌덩어리보다 더 단단하고, 종이보다 가볍고, 천 년을 두어도 썩지 않는 재질로 바뀐답니다. 그러니까 생나무가 원통히도 잘리어, 시궁창에 처박힌 채 썩어서, 건져져서, 물에 씻겨, 마르니, 전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것이지요.


'썩어서 썩지 않는 존재'


저는 열의 아홉을  잃어도  하나를 얻을  있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을  같았습니다. 저는  나무 화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상태가, 사실은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몸으로 태어나는 모태가 된다는  엄청난 비밀.   토막 나무는,  나무의 ''  것입니다.



- 최명희 선생님, '나의 혼, 나의 문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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