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라는 종교

<진짜 도둑>이 던지는 진짜 우정 이야기

by 올리브나무




우정이 종교를 대신하던 때가 있었다. 기쁨과 슬픔의 원천이자 미래를 꿈꾸고 현재를 버티게 하는 우정이라는 종교. 사춘기라는 불안정한 시기를 버티게 해 준 원동력. 적어도 '라떼'는 그랬었었다.

우정의 바탕은 신뢰다. 신뢰란 무조건 믿는 것이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믿어주는 것, 믿음이 가는 것. 의지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정은 종교에 버금가는 것이고, 거룩하기까지 하다. 참된 우정은 흔치 않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종교니, 우정이니, 신뢰니 하는 것들은 이성이 끼어드는 영역이 아니다. 이성이 끼어들면 흔들리고 헷갈리고 무너진다. 씁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없다.




진짜도둑.jpg <진짜 도둑>, 윌리엄 스타이크 글, 그림 / 베틀북


<진짜 도둑>은 동물들이 등장하는 우화이다. 동물들이 주인공인 글은 어린이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지기 쉽지만, 동물에게 인간의 속성을 투영시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울림 있는 책들도 많다. 오히려 어린이책이라는 느낌을 지우고 어른들도 깊이 빠져 읽을 수 있게 된다. 대표적으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그러하듯이.


<진짜 도둑>의 주요 등장인물은 수문장 거위 가윈, 왕국의 수장인 곰 배질, 그리고 가난한 생쥐 데릭이다. 등장인물도 단촐하고 스토리도 심플하다. 그런데 이야기 전개가 흥미롭고 각 인물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 책에 빠져들어 단숨에 읽게 된다.




가윈은 왕궁의 보물창고를 지키는 수문장이다. 강직하고 신뢰할만한 성품을 알아본 왕이 수문장으로 친히 임명했다. 가윈의 꿈은 수문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왕에게 인정받는다는 자부심과 왕을 기쁘게 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으로 따분하기 짝이 없는 수문장 자리를 수락한다.

보물창고의 열쇠는 단 두 개뿐. 하나는 왕이, 나머지 하나는 가윈이 관리한다. 열쇠가 아니면 그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철통보안을 자랑했기에 가윈은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충만했다. 아주 오랫동안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루했지만 평화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보물창고의 보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루비에서 시작해 금붙이, 은장식, 급기야 보물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캘리캑 다이아몬드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가윈은 보물이 사라지는 것에 관해 어떠한 설명도 할 수가 없었다. 실수로라도 문을 열어놓은 적이 없었고, 보물창고 주변에는 이상한 낌새도 없었으며, 자물쇠도 멀쩡했다. 가윈은 중대한 책임감을 곱씹으며 더욱 철저히 경계했고, 교대로 창고를 지키는 거위들에게도 번번이 주의를 주었다. 가윈의 유일한 낙이었던 몽상하던 버릇까지 없앴다.


그러나 가윈은 결국 왕 앞에 불러가 심문을 받고, 왕의 미심쩍은 눈초리에 상처를 입었다. 가윈은 무뚝뚝하고 솔직한 말투로 왕에게 물었다.

"혹시 폐하께서 약간의 착오를 일으키신 건 아닌지요? 보물을 옮기시고 잊으신 건 아닌지요?"

이 솔직한 물음을 무례하다 느낀 왕은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은 실수를 하지 않아!"




가윈 아니면 왕이 범인이었다. 왕은 범인일 수 없기에 가윈이 범인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믿었다. 왕 역시 혼란스러웠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고, 가윈을 믿었던 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실수라고 확신했다.

가윈은 감옥에 갇혔고, 법정에 세워졌다. 동물들이 법정으로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가윈의 친구이거나 가윈을 존경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재판이 열리기 전에는 가윈이 도둑 일리 없다고 믿었지만, 막상 재판을 지켜보면서 가윈이 도둑이라고 믿게 되었다. 생쥐 데릭만 빼고.


데릭은 왜 가윈을 도둑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가 진짜 도둑이기 때문이다. 육중한 문, 두꺼운 벽돌, 튼튼한 자물쇠 덕분에 누구의 침입도 불가능하다던 믿음은 허상이었다. 커다란 돌과 돌 사이에 생쥐 한 마리 정도는 드나들 수 있는 틈이 있었던 것이다.


생쥐 데릭은 우연히 보물창고의 틈을 발견하고 보물창고에 들어가게 된다. 온갖 보물이 가득한 보물창고는 놀라움 자체였다. 그런데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처지와 대비되면서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야릇한, 어찌 보면 야릇할 것도 없는 일을 저지른다. 보물을 훔치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루비 한 개로 시작했다. 도둑질을 했다는 자책감을 벗기 위해 루비 한 개쯤은 괜찮을 거라고 위안 삼는다. 마음에 불편함과 기쁨이 혼재했지만, 기쁨이 더 컸다. 데릭은 매일 보물창고를 드나들며 더 많은 루비를 훔쳤다. 집이 한층 나아 보였고, 자기가 중요한 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밖에 나가서도 왠지 전보다 존중받는 것 같았다.


데릭은 보잘것없는 지위를 보상받기 위해서 인양 더 많이, 더 자주 보물을 훔쳤다.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도취되었고, 그럴수록 더 큰 욕심이 생겨났다. 죄책감은 사라지고 훔치는 게 아니라 그저 보물을 내온다고 합리화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비밀이어야 했다.

급기야 데릭은 엄청난 크기의 다이아몬드까지 손을 댔다. 창고에서 다이아몬드를 보고 난 후에는 자기 집이 너무나 초라하게만 느껴져 어떻게든 다이아몬드를 가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데릭은 본인의 대담함에 기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쭐했다. 다이아몬드를 훔친 데릭은 궁전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홀로 파티를 연다. 우연히 보물창고에 들어가게 된 것은 행운일까, 사고일까?





데릭은 가윈이 도둑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된 소식을 듣게 된다. 그제야 비밀로만 간직하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위안 삼던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 깨닫는다. 그러나 한 가닥 희망을 품는다.

'가윈은 훌륭한 거위니까 아무 일 없을 거야. 가윈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누가 믿겠어.'

데릭은 가윈이 죄를 덮어쓴다면 자백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막상 재판을 지켜본 데릭은 놀랄 뿐이었다. 왕은 가윈을 도둑으로 확신했고, 친구들도 모두 그것을 믿는 분위기였다. 현명하다고 믿었던 왕도, 가윈에게 등 돌리는 친구들도 실망스러웠다. 데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궁지에 몰린 가윈이 창문으로 날아올라 도망쳤다.


데릭은 가윈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죄를 자백했을 거라고 스스로 믿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책과 후회로 고통스러웠다. 데릭은 닥치는 대로 보물을 더 많이 훔쳐냈다. 가윈이 사라진 마당에 보물이 계속 사라졌으니, 가윈이 부당하게 희생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동물들은 부끄러웠고, 왕은 절망했다. 진짜 도둑을 잡겠다고 포상금과 수색대를 늘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데릭은 가윈의 무죄가 증명되자, 훔쳤던 보물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마을은 또 한 번 술렁였다. 진짜 도둑을 찾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문제는 동물들이 저지른 실수였다. 실수를 바로 잡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다시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데릭은 자신의 실수로 모두가 불행해졌다는 사실에 불행했다.





도망친 가윈은 숲에서 운둔자로 살았다. 아량, 사랑, 충성심, 우정, 그 따위 것들에 대한 허무만이 가득했다. 시간이 흘러 가윈은 새로운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어느 날, 평소보다 멀리 나갔다가 가윈을 찾아 헤매던 데릭과 마주쳤다.


데릭은 그 간의 모든 일을 가윈에게 털어놓았다. 악의 없이 보물을 훔친 일, 가윈에게 혐의가 씌워져 충격을 받은 일, 자백하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하지 못할 일, 그 일로 인한 고통.

"나를 용서할 수 있겠나?"

가윈은 오열했다. 진실이 밝혀진 기쁨, 데릭에 대한 분노와 동정심, 비참함, 왕과 친구들에 대한 씁쓸함, 서글픔. 이 모든 감정이 한 데 뒤섞여 복잡했다.

"괴로워하게 내버려 두게. 다들 고통받게 내버려 둬. 난 다시는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아."

마음을 닫은 가윈에게 데릭이 말했다.

"우리 모두 실수를 저지르지 않나."


가윈은 데릭과 함께 마을로 돌아온다. 왕은 환대하고 친구들은 용서를 빌었다. 가윈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알았으므로 그들을 향한 사랑은 한층 현명한 것이었다.


이야기는 해피 엔딩.

그러나 마음에는 씁쓸함이 남는다.

다시 돌아온 가윈의 사랑과 우정은 어떤 빛깔로 변했을까?

무너졌던 신뢰는 어떻게 다시 지어졌을까.

현명한 우정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일까?


진실, 믿음, 우정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책.

어린이, 어른 모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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