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지만 따뜻한, 약하지만 강인한
글 쓰는 일로 직업을 삼게 되었지만, 특별히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다. 그렇다고 타고 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초등학교 때는 무슨 때만 되면 만만한 게 백일장 아니면 사생 대회였던지라, 선생님이 툭하면 글을 써와라, 그림을 그려 와라 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무수한 대회에서 이렇다 할 수상 경력이 없었던 걸 보면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닌 거다.
그런데 딱 한 번 선생님께 이름이 불린 적이 있었다. 학급에서 단 한 명에게 글짓기 상을 주었는데, 나와 한 친구가 최종 후보로 올랐다. 결국 상은 그 친구가 받았다. 나는 상을 받지 못해서 아쉽다는 생각은 1도 없었고, 선생님이 읽어 주신 그 친구의 글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 때껏 내가 봐온 초등학생들의 글과는 뭔가 달랐다. 지금까지도 글의 부분 부분을 기억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 친구의 글이 나의 첫 번째 글쓰기 스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글은 이렇게 쓰는 것, 이라고 한 수 가르쳐 주는 느낌이었다.
친구의 글은 할머니를 소재로 쓴 글이었다. 부모님이 일 때문에 바쁘셔서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아이였다. 엄마이자 친구, 그 이상의 모든 것이 되어준 할머니. 할머니의 사랑을 그렇게 따뜻하고 진실되게 담아낼 수 있다니! 친구의 글을 들으면서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꾸미거나 지어내지 않고, 내 할머니의 진짜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은 하늘이 내리는 복이다. 그런데 좋은 할머니를 만나는 것은 복을 내리는 신으로서도 참으로 까다롭게 신경 써야 가능한, 아주 선별된 복인듯하다.
인간의 사랑 중에 조건 없는 사랑을 꼽자면 단연 엄마의 사랑일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랜드 마더'가 아닌가! 따뜻하고, 넉넉하고, 조건 따위 따지지 않는,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또 사랑을 주시는 할머니!
'할머니'의 접두사 '할'이 '크다', '위대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어쩜 '그래드 마더'와 딱 들어맞는다. 제3의 그 어떤 언어도 할머니의 뜻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할머니는 그랜드 마더이다.
독일의 작가 페터 헤르틀링의 작품 <할머니>는 몇 번이나 읽은 책이다. 어린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많이 권했는데, 읽고 나면 어른들의 반응이 훨씬 더 뜨겁다. 친구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한 적이 있다. 친구는 속으로 '할머니 이야기겠지, 그러니 감동적이겠지, 언젠가 기회 되면 읽지' 했단다. 그러다가 읽게 되었는데, 읽고 나서 문자를 보냈다.
"ㅠㅠ"
말이 필요 없다. 이 책은 할머니, 그 자체다. 무섭지만 따뜻하고, 약하지만 강인한 그랜드 마더!
주인공 칼레는 다섯 살 때 부모님을 잃는다. 칼레를 맡기고 차를 타고 가다 벌어진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다섯 살 칼레가 안쓰러워 칼레를 안고 머리를 끊임없이 쓰다듬었지만, 할머니만은 그러지 않았다. 금세 눈물을 거두고는 칼레의 삼촌과 숙모들에게 말했다.
"어쩔 거냐? 살아나가야지. 어쨌든 살아야 해. 칼레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 같이 살면 돼."
삼촌 가운데 한 명이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 연세에요?"
할머니가 그 말에 삼촌을 비웃으며 호통쳤다.
"그럼 네가 칼레를 키울 거냐?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도 마라!"
그렇게 칼레는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보통 사람들보다 목소리가 컸고 욕도 잘했지만, 칼레만은 조심스럽게 대했다.
'내가 미쳤지. 늙은이가 어린아이를 키우려 하다니... 칼레 때문에 백 살까지 살아야 하나?...
내가 늙었다는 생각은 말아야지. 칼레와 나는 잘해 나갈 거야.'
장마다 이어지는 할머니의 독백.
할머니는 무섭지만, 멋진 유머를 할 줄 알았고, 칼레는 그런 할머니를 좋아했다.
칼레와 할머니는 싸우기도 하고 갈등도 있지만 서로 적응하며 함께 성장한다.
살아가면서 늘 진행형인 꿈이 있다. 아이와 함께 좋은 엄마로 성장하기.
그리고 또 하나 추가. 좋은 할머니로 나이 들기.
좋은 엄마도, 좋은 할머니도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일단 좋은 엄마로 성장하다 보면, 엄마일 때는 몰랐던 것을 할머니가 되어서는 더 알게 되지 않을까.
엄마에서 할머니로 성장한다는 것을, 나는 우리 엄마를 보면서 배운다.
내 엄마이기만 했을 때와 내 아이의 할머니가 되고 나서의 엄마는 많이 다르다.
나에게는 엄격했던 엄마가 내 아이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따뜻하다.
뭘 어쩌길 바라지도, 조바심 내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이제는 좀 더 젊어 보이는 것보다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을 가꾸며 멋진 할머니로 성장하고 싶다.
약하지만 강하고, 무섭지만 유머가 넘치는 칼레의 할머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