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었던 2000년대 초반 당시, 난 학문적으로 빼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긴 했지만, 전교 1~2등을 놓고 경쟁하는 최상위권의 학생들과는 좁힐 수 없었던 격차가 있었다. 자녀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던 부모님을 두었지만, 나 스스로 학구열이 높은 편이 아니었다. 당시 공부보다는 <디아블로 2>나 <악튜러스>와 같은 게임들에 관심 많았던 학생이었다.
나는 중학교 졸업 후 집 근처에 있는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길 희망했지만, 냉정하게도 나의 성적으로는 그 학교를 진학하기엔 뒷받침되어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명확한 꿈이 있어서, 그 꿈을 위해 전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있었던 것도 아닌 상황. 그렇게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새해를 맞이했다.
평소와 같이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집 거실 바닥에 놓인 신문의 광고문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미국 교환학생에 도전하세요!> 그 문구를 보고는 뭔가에 홀린 듯, 광고 안에 적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문화 교류의 일원으로 미국 공립학교 교환학생을 모집하고 있으며, 사립학교에서 유학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학비가 들고, 교환학생으로 선발되기 위해선 SLEP(Secondary Level English Proficiency) Test라는 영어능력시험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성적을 받아야 합니다."
이 글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아 이런 기회가 있구나’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까진 유학에 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선발이 되려면 통과해야 하는 영어 시험에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의 얘기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평범한 나날들을 보내던 중, 갑자기 머릿속에 어떤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내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학교에서 영어 과목은 점수가 꾸준히 잘 나오는 편이었기에, 막연하게 나의 영어 실력이 미국 학교에 다닐만한 수준은 되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나의 영어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받고 싶다는 생각에, 부모님께 시험을 한번 쳐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당시 부모님은 나의 제안에 처음엔 어안이 벙벙하신 것 같았지만 이내 “기특하네”라고 칭찬해 주시며 흔쾌히 시험을 보게 해 주셨다. 부모님의 확신 없는 반응은 전혀 놀랍거나 서운하진 않았다, 나 자신도 기대가 없었으니깐.
어느 쌀쌀했던 겨울날 아침, 부모님과 나는 오목교역으로 가 근처 중학교 강당에서 진행된 교환학생 프로그램 설명회에 참석했다. 설명회가 끝난 직후 학생들만 모아놓고 영어능력시험을 진행했다. 시험지에 한글이 하나도 없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학교와 학원에서 열심히 외운 영단어들을 생각해 내며 힘겹게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시험에 온전히 몰입했는지 눈 깜짝할 새 감독관이 시험이 5분 뒤 종료된다고 알려주었다. 잘 풀었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기대가 없으니 편한 마음으로 시험지를 제출했다. 감독관이 빠르면 1주일 내로 시험 결과를 전화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시험을 치른 후, 나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학원에 다니고 게임을 하며 평범한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목요일 저녁,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집 전화기가 울리고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의 얼굴을 보니 기다린 곳에서 전화가 온 것 같은 반응이다. 밥을 먹으며 나는 엄마의 반응을 지켜봤다. 통화하던 중, 엄마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더니, 이윽고 전화를 내려놓으셨다. 누구였는지 무슨 일 있는지 아빠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조금은 놀란 듯 말을 꺼내셨다.
“아들 시험 합격했대.”
엄마의 한마디에 식사 자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3줄 요약:
1. 우연히 신문에 올라온 미국 공립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 광고를 보았음.
2. 유학에 뜻은 없었지만, 내 영어 실력이 궁금해서 교환학생 시험에 응시해 봄.
3. 기대가 전혀 없던 상황에서 아주 간신히 시험에 통과함 - 67점 만점에 45점 이상을 받아야 통과인데, 난 딱 45점을 받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