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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버지니아로!

by 홍머루

꿉꿉했던 장마가 마무리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말, 우리 가족은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략 8~9월에 출국할 수 있게 서류 작업을 포함한 모든 준비를 마쳐놓았지만, 아직 미국 어디로 갈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평범한 유학이라면 학생이 원하는 지역과 학교를 고를 수 있었겠지만, 미국 공립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당시엔 학교와 지역이 무작위 배정이었다.


6월에 진행된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몇몇 다른 교환학생들은 벌써 학교/지역이 정해져서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지만, 나의 경우는 8월이 거의 다 돼서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부모님이 유학원에 전화를 걸어 따져봐도, 학교/지역 배정 업무는 미국 현지의 에이전시가 담당하는 일이라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형식적인 답변밖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으로 하루이틀 보내던 와중 8월 초가 돼서야 나의 지역, 학교, 호스트 가족이 배정됐다는 전화가 왔다. 지역은 미국 동부의 버지니아주였다. 버지니아라는 지명은 들어봤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 검색해보니 미국 동부에 자리 잡고 있고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 근처에 있었다. 학교는 전교생이 1,600명 정도 되는 리치먼드 (버지니아주의 주도) 근교에 있는 공립학교였고, 호스트 가족은 나랑 나이 차가 2살이 나는 외동아들 한 명을 둔 미국인 가정이었다.


며칠 뒤, 유학원에서 호스트 가족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집 사진을 보니 집 주변에 나무도 많아 보이고, 선한 인상을 가진 호스트 가족의 사진들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도착 날짜도 알려드리고 인사도 드릴 겸, 정보에 포함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니 굵지만, 상냥한 호스트 아저씨가 인사를 건넸다. 영어 듣기평가에서나 들리던 원어민이 나에 관해서 궁금한 것들을 열심히 물어보니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고 입도 잘 떼어지지 않았다. 어영부영 30분 정도를 통화한 후, 전화기를 내려놓자 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제 정말 모든 준비가 끝났고 받아놓은 날짜에 비행기에 몸을 싣기만 하면 되었다.


출국 날 아침, 꽉 찬 이민 가방 두 개를 차에 싣고 인천공항으로 이동했다. 손자가 태평양 건너 먼 길 떠나는 걸 배웅하기 위해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인천공항으로 총출동했다. 영종대교를 건너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할머니와 엄마는 마치 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처럼 내 손을 꼭 잡고 몇 시간 남지 않은 나와의 순간을 누리시는 것 같았다. 그런 엄마와 할머니께 “1년 금방 가요~”라며 위안을 드리려 노력했지만 두 사람에게 나의 말은 닿지 않는 듯했다.


공항에 도착 후 절차를 마친 뒤, 출국심사를 받기 위해 출국장 앞에 섰다. 최종적으로 한국을 떠나기 전,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부모님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이미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더 있다간 엄마의 슬픔이 나에게도 옮을까 봐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꼭 껴안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출국 심사를 받고 비행기에 올라타니 인제야 유학을 가는 게 실감이 난다. 부모님은 외동아들을 이역만리에 떨어뜨려 놓는 게 무척 힘드셨겠지만, 나는 당시엔 마냥 설레고 기대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다니던 중학교에선 해외여행 다녀온 애들도 몇 명 없었는데,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1년 동안 멀리 미국에서 거주하고 공부한다는 건 생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현실이 되려 하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지 대략 24시간 후에, 도쿄, 디트로이트를 거쳐 힘겹게 리치먼드공항에 도착했다. 마지막 비행기에서 내리니 주위엔 아시안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입국장에서 짐을 찾다 보니, 미국인 아줌마 한 명과 또래 아이 한 명이 내게 말을 건네왔다. “Are you OOO?”


맞다고 대답하고 만나서 반갑다고 서툰 영어로 인사하니, 와락 나를 껴안아 주신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의 포옹은 이번이 처음이라 어색해서 쭈뼛쭈뼛 댔지만, 나를 환영해 주는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져서 무척 감사했다. 짐을 차에 싣고 공항을 나서니 길거리 표지판에 한국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온 세상이 알파벳으로 도배된 걸 보니 내가 미국에 오긴 왔구나 싶었다.


대략 40분쯤 걸려서 며칠 전 사진에서 봤던 호스트 가족의 집에 도착했다. 전화로 인사를 나눴던 호스트 아저씨는 출장 중이라 집에 없다고 했다. 호스트 아줌마가 간단하게 집의 구조를 설명해 준 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더 자세하게 대화하자고 하셨다. 긴 여정으로 피곤했기에 짐도 풀지 않은 채 곧바로 숙면에 들었다. 미국 유학의 첫 발걸음을 그렇게 내디뎠다.


3줄 요약:

1. 8월 초에 미국 동부에 위치한 버지니아주의 한 공립고등학교에 배정됨.

2. 가족의 성대한 배웅을 받으며 미국으로 출국함.

3. 대략 24시간 뒤에 도착한 리치먼드 공항에서 호스트 가족을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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