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시작할 때 나는 저자의 이력을 꼭 먼저 읽어본다. 같은 사건이나 사실이라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너무나 다르게 읽힌다는 것을 떠돌이 생활에서 뼈저리게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배경을 가졌길래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가도 나에게는 큰 관심사다.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몇 편에 걸쳐 나의 소개를 하려고 한다. 나를 규정하는 강력한 키워드 극 내향형. 대만에 살던 시절 썼던 글로 설명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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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트레스가 몰려온다. 아. 오늘 외출하는 날이지. 생각 만으로 밤새 충전한 기가 등뜨리(등허리) 쪽으로 쭉 빨려나가는 것 같다. 어제 밤, 맛나는 걸 먹는 일정을 동선에 포함하여 계획을 짜면서 매니큐어를 바를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괜찮았는데. 갑자기 이불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나가면 위험할 거 같은데.
일정을 하나하나 다시 되짚어 본다. 정말, 정말, 진짜로, 오늘, 꼭, 해야만 하는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그렇다’다. 한 달째 미뤄온 일들이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에잇. 밥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씻고, 준비하는 동안은 잘 길들여진 소 같이 움직인다. 그러나 집을 떠나야 하는 순간은 왜 그리 빨리 다가오는지. 신발도 신고 캐리어도 손에 쥐고 문 앞에서 잠깐 생각한다. 냉장고 문은 닫았는지. 가스불은 잠갔는지. 부러 들어가서 본다. 강박증 증세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냥 문 여는 순간을 몇 초라도 미루고 싶은거다.
심호흡을 하고. 결국은 문을 연다. 윽. 바깥냄새. 목욕탕 뜨거운 물에 들어갈 때처럼 조금씩 적응한 후 어렵게 발을 내딛는다. 휴
운전도 싫어하는, 덕분에 차도 없는 나는 최대한 불특정 다수와 말을 하지 않는 공공교통. 버스를 탄다.
맨 뒷자리에서 한 두 칸 앞. 여기가 젤 숨기 좋다. 옆에 누가 앉을 확률도 낮고.
첫 번째 목적지. 맛나는 점심. 그렇다 이미 점심시간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한 시간 걸리는 걸 차치하고도 집에서 출발하는 게 제일 어렵기 때문이다. 꽤 오랫동안 기대하던 삼겹살 김치찜과 냉면을 시켜서 여러 반찬과 밥 한 공기까지 하나하나 음미하며 먹는다. 외국 살아도 결국 먹고 싶은 것은 한식이다. 곧 배가 불러오지만 굴하지 않고 꾸역 구역 밀어 넣는다. 괜찮다. 소화제 갖고 왔다. 내가 언제 또 나온다고.
자식도 독립한 아줌마에게 볼일이 특별한 게 뭐 있겠나. 주말에 한번 가는 시장에서 살 수 없는 것들 사러 가는 거지. 예전 살던 동네의 한국 슈퍼에 도착. 미초, 당면, 단무지를 사서 캐리어에 쑤셔 넣고 걸어서 빙수집에 간다. 덥다. 속이 예민해서 평소라면 절대 먹지 않을 빙수로 땀을 식힌 후 안경집에 걸어간다. 반년 전에 산 새 안경테에 안경알 맞추러. 멀지만 내 기록이 여기 다 있어서 말 몇 마디 안 해도 해결된다. 그다음은 외출을 기대하게 했던 유일한 동기, 호기심을 해결하러 가야 하는데 이미 기 다 빨려서 힘들다. 이럴 때는 우버찬스.
그 유명한 타이베이 101 타워에 초고층의 흔들림 방지를 위해 설치했다는 댐퍼(damper)를 구경하러 89층 전망대까지 간다. 관광지라 사람이 많네. 아이스라테를 사 들고 창가에 쭈그리고 앉아 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멍 때린다. 한참만에 정신이 좀 돌아온다. 댐퍼를 실컷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어떻게 댐퍼가 지진이나 강풍시 초고층을 보호해 주나에 대해 배운 것도 복기해 보니 도파민이 마구 나온다. 히히. 집에 돌아갈 기운이 충전된다. 내가 극 내향형이지만 이 호기심 덕분에 가 본 데가 웬만한 외향형들 보다 많다. 그들은 사람 만나러 주로 돌아다니지 않나.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다. 이미 저녁시간이 되어가지만 소화제를 먹었어도 아직 배부르니 오랜만에 일본식 크레페 케이크를 먹으러 으리으리한 카페에 간다. 평소라면 못 먹는 케이크를 두 개나 시켜 먹는다. 괜찮다. 설사약도 들고 왔다. 내가 언제 또 나온다고.
그 동네는 거대 몰이라 길이 미로 같지만 어젯밤에 시뮬레이션한 데로 보무도 당당하게 길을 나선다. 아뿔싸. 반대방향으로 십 분이나 걸었네. 더운데. 나의 극 내향형 성향을 지지해 주는 엄청난 방향감각. 그렇다. 나는 길치다. 극 길치. 나오기 싫은 또 다른 이유다. GPS가 무용지물인 내게 지형지물 숙지는 필수다. 붙박여 있는 건물 모양을 외워 놓아야 길 잃고 한 시간씩 헤매다가 볼일을 다 못 봐 또 나와야 하는 불상사를 줄일 수 있다. 다행히 101 타워가 워낙 높아 어디서나 보여서 방향은 금방 찾는다.
이미 밖은 어두운데 환하게 불을 켜 놓고 예쁜 옷을 진열해 놓은 운동복점을 지나다 눈에 띄는 게 있어 잠깐 발걸음을 멈춘다. 밖에 나가는 일이 없어 옷도 필요 없다 보니 평소에 운동복이나 입고 산다. 요즘은 그나마 운동복이 평상복처럼 나와서 정말 좋다. 점원이 그 밝은 조명을 등지고 무지막지하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더러 들어와서 보란다. 당황스럽다. 옷을 고르고 시착해 보는 데만도 기가 빨리는 나는 망설인다. 꼭 필요한 옷인가.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절규가 들리는 것 같다.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한 채 지나간다.
마지막 목적지는 일본슈퍼. 한국슈퍼들이 규모가 작다 보니 거기서 못 사는 건 일본슈퍼에서 산다. 넘의 나라 살이 뭐 하는 수 없지. 기왕 사는 거 최선을 다해 많이 산다. 그래야 더 오래 집에 박혀 있을 수 있다.
무거워진 캐리어를 끌고 바로 옆에 있는 특급호텔로 간다. 여기서라면 우버를 타기 위해 실랑이할 필요가 없다. 몰이 너무 커서 GPS만 따라오는 기사님들이 헤매기 딱 쉽거든. 게다가 에어컨 잘 나오는 로비에서 앉아서 기다릴 수 있지 않나. 짐도 많은데. 다들 슈트케이스 든 여행객이라 로비만 이용하는 나도 자연스럽게 묻힌다. 우버 차 문을 닫아주는 벨맨 아저씨한테 좀 미안하다. 하지만 나도 이 호텔 이용하는 고객이다. 볼일이 너무 밀리고 들러야 할 장소가 많을 때는 가끔 여기 와서 자기도 한다. 이틀연속 집 밖을 나서면 체력적으로, 정서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에 한번 외출로 이틀 분의 볼일을 볼 수 있으니 효율적이다. 그러니 좀 봐주라.
40분쯤 걸려서 집에 도착. 화려한 아파트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드디어 집 문을 연다.
아. 안온한 냄새. 쾅 닫히는 문. 짐은 현관 안에 들여만 놓고 거실에 놓인 카펫에 대자로 누워서 생각한다.
한 달은 나가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