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도 넘은 인류학자 꿈나무
"너 이렇게 넋 놓고 지내다가는 곧 하나밖에 없는 딸이랑 대화도 못해."
딸내미가 다섯 돌이 되어가는 어느 날부터 남편이 매일 협박과 회유를 반복했다. 어처구니없게도 허약한 체질에 출산과 육아, 경제적 궁핍을 견뎌내느라, 나와 정반대로 에너지가 넘쳐나는 딸내미를 따라다니느라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고갈되어 겨우 숨만 쉬며 사는 내게 남편은 학교에 가서 영어를 더 배워야 한다고 강변했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나온 자기도 미국 청소년들이 하는 말은 잘 못 알아듣는다며.
사실 나도 미국에서 학교에 다녀보고 싶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는 다른 나라의 역사서도 읽어보고 싶은데, 1990년대의 번역서에는 중학생 수준의 번역이 너무 많아 읽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어서, 언젠가 나도 기회가 된다면 미국 대학에서 영어를 배워서 원서를 술술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와서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장을 다녔고, 거기서도 많은 것을 배웠지만,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았었다. 게다가 나보다 7년 앞서 이민 온 모친은 가정주부로 살아도 되는 유복한, 그리고 영어를 모르는 아줌마들과 매일 몰려다니며, 영어를 모르니 미국 사회를 모르고, 그래서 생기는 오해를 한국식 사고방식과 버무려 실제의 미국과는 전혀 다른 어떤 판타지 세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벌어질 법한 상상 속의 어떤 공포를 극대화한 뒤 그 과대망상을 공유하며, 가족들에게도 그것을 믿으라 강요하곤 했다. 당연히 사회생활을 하는 아버지나 언니동생이 한마디로 일축했고, 그럴 때마다 발악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게! 큰일 난다! 고 악담을 하며. 그 그룹의 아줌마들과 평소에는 서로 삐지고 싸우고 하면서도 '가족들이 무시한다'며 토로할 때만 대동단결하곤 했다. 그 후, 늦게 이사 온 내게 미국을 가르쳐 준다며 미국을 잘 모르는 내가 들어도 어처구니없는 썰을 풀다가 나의 간단한 질문이나 코멘트 하나에 대답을 못 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온 가족이 모친의 말이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고, 모친은 노발대발했고, 아버지가 훌륭한 인격을 지니신 덕에 그나마 가족이 유지되었을 뿐 아무도 모친과 대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결국 나는 딸내미가 유치원(킨더-미국은 킨더부터 공교육이다)에 입학하던 날, 나도 동네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엄마,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잘 놀아. 그럼 다 괜찮아!"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 한 지 12년 만에 대학을 다시 들어가던 첫날, 말은 안 했지만 극도로 긴장 한 내게 다섯 돌이 된 딸내미가 애기 뽈 살을 출렁이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를 앉으라 손짓하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내 어깨도 두드려줬다. 다 괜찮다고. 학교는 물론 사회생활도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탓에, 미국에 살아도 쓸 일 별로 없으니 퇴화하는 영어 실력 탓에 무한히 쭈그러져 가는 내게 그 어떤 말보다 큰 용기가 되었고, 나는 그렇게 만 34세에 학생이 되었다.
처음 들었던 과목은 미국대학 졸업을 위해 필수로 듣는 영어 수업보다 한 단계 쉬운 영어수업이었는데도 나는 참 힘들었다. 학교를 떠난 지 꽤 되니 5분 집중하기가 힘들었고, 계속 무슨 소설을 읽고 에세이를 써 오라고 하는데, 나는 원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괴로웠다. 내가 글을 잘 쓴다는, 한국에선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칭찬을 들으며 A를 받았어서, 그다음 학기에는 필수 영어를 들었어야 하는데, 소설이라면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미국 대학의 또 다른 필수과목인 세계사를 덜컥 수강신청했다. 너무 어려우면 중간에 그만두지 뭐 하면서. 간만큼 이득이지 않겠나 하며. 역시나 역사책이라 단어부터 다 새로 배워야 했고(한국도 역사책 속 단어는 어렵다), 영어로 발음이 달라서 역사 속 어느 인물, 어느 사건인지 못 알아듣는 경우도 많았던 데다, 에세이를 쓰면 영어로 매끄럽지 않아 학교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튜터가 거의 대부분의 문장을 빨간펜으로 북북 그어 고쳐주어 너무 무서웠고, 수업 중 중요한 요소인 토론 시간에는 할 말 많은데 영어로 말이 안 나와서 가슴을 쳐야 하는, 고문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정작 나는 너무 재미있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같은 사건을 두고 한국과 미국이 보는 관점이 다르고, 그를 설명하는 방법과 방향성이 달랐다. 같은 뜻의 단어도 영어로 쓰면 오묘하게 뉘앙스가 달랐던 건 덤이다. 교수님이 설명하다 제시하는 책들도 사서 읽어보는 등, 그냥 좋다고 표현하기 부족할 만큼 미쳐있었다. 그 학교에서 제공하는 역사학 수업을 거의 다 들었을 즈음 어느 교수님이 나의 끝도 없는 질문공세를 당하다 지쳐 말씀하셨다. "너는 역사학이 아니라 인류학이 맞는 것 같아. 네 관심은 역사 속 사람이잖아."
그렇게 듣게 된 인류학수업.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았다. 인류학이란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태인류학, 언어인류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고대의 사회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견지를 가진 미국에선 고고학이 인류학에 포함된다. 부산에서 서울로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사 다니며, 다양한 직장을 다니며 보고 들은 것을, 이미 어떤 분이 유식한 말로 잘 정리해 학설로 정립해 놓은 것을 보고 전율했다. 특히 관찰자의 주관적 감정도 어떤 논리를 증명해 가는 데에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역사학에서는 불가능한데. 서양에서 역사학은 문헌에 '기록'된 증거들로 역사적 사실을 논증해 내는 과정인 경우가 많아 실제로 벌어진 사건과 역사학에서의 정설이 다를 수 있다. 덕분에 '얼마나 다수의 동료역사학자를 설득하여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할 수 있나'가 관건이라 역사학 수업에 토론이 중요하다. 내 학파의 논리만 답이라고 주장하는 상반되는 학파들의 글을 읽자니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왜 하나만 답이어야 하나.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데. 내가 역사를 읽는 이유는, 역사적 사건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든 문화적 배경은 뭔가. 우리와 얼마나 다른 걸까. 내가 그때 태어났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걸 상상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이었는데, 역사학 자체보다는 인류학에서 정립해 놓은 학설과 가설들을 역사에 대입한다면 훨씬 재미나는 상상이 가능 해 질 것 같았다. 이미 역사학과 인류학을 합쳐놓은 연구분야도 있고, 많은 역사학 전공생들이 인류학을 부전공하기도 한단다. 오! 나도 하고 싶다! 10대 청소년처럼 피가 들끓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시아로 떠나게 되었다. 졸업을 못했으니 인류학자는 아니지만 나도 코스프레를 해 보기로 했다. 인류학자가 새로운 지역에 연구하러 가면, 현지 언어를 배우고, 그들이 사는 곳에 살고, 그들과 같은 것을 먹는다. 나는 엑스펫이라 현지 사람들 사는 곳에 똑같이 살 수는 없었으나, 말은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갔었던 일본. 우리 딸은 엄마가 일본말을 한마디도 못했던 때, 조금은 구사하지만 급할 땐 영어로 의사소통할 때, 그리고 유창하게 말할 수 있을 때를 다 기억한다. 그리고 엄마가 현지말을 구사하는 정도에 따라 본인이 누리는 혜택이 극단적으로 달랐다는 것도 분명히 기억한다. 말을 할 줄 알게 되니 온 가족 세명의 문화체험이 시작되었고, 길거리에서 파는 모든 것을 다 먹어보고, 시장에서 하나씩 사 보고, 모르면 물어보고, 기회가 되는 데로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여행을 다녔고, 그곳에는 또 다른,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재미가 있었다. 각자 학교에서, 직장에서 알아 온 맛집을 주말이면 셋이 가서 메뉴를 찬찬히 읽어보고 다 먹어본 다음 분석하고 품평했다. 먹는데 목숨 건 사람들처럼. 덕분에 가족 간의 대화주제가 폭발적으로 많아졌다. 딸내미 본인은 사춘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몰랐다. 미안.
문제는 일본이 마지막이 아니었어서, 홍콩, 베이징, 타이베이까지 계속 이사 다녔다는 것이고, 똑같은 학생노릇과 문화체험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몇 년인가. 나는 프로학생이다. 어느 날은 나도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제 와서 그만두면 나는 뭘 하고 살아야 하나 생각하면 답이 없어 그만둘 수도 없다. 게다가 하나뿐인 딸내미랑 이야깃거리가 많아서 아시아에 살아도 영어가 늘었다. 딸내미가 이제는 엄마가 나이 먹고 그만한 영어를 구사하기 얼마나 어려웠을지 이해하기 때문에 문법 틀리게 말하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정말 고맙다.
그저 딸내미와 대화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시작한 학교. 그 목표를 넘어선 지 오래고, 그렇게 쌓아온 자존감은 내 인생 최대의 소득이다. 그때 용기를 내어 학교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기도 싫다. 그사이 딸내미는 독립했고, 어른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지 반년. 나는 다시 학교에 돌아가 인류학을 제대로 전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 열심히 배워서 그동안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나도 그 유식한 말로 잘 정리해서 다음 세대 사람들이 인용할 수 있는 책을 한 권 쓰고 싶다. 여전히 허약한 몸 때문에 쉬엄쉬엄 해야 하겠지만 지금까지도 잘해 왔다. 나는 할 수 있다. 프로학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