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ulture의 위상 4
코로나가 끝나가던 2021년 가을, 나는 맨해튼 32가의 Korean Way에 있는 한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카가 동부의 어느 명문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나도 명문대학 구경을 하고 싶어서 기차를 타고 갔다가 하필 그날 장대비가 오는 바람에 체력소모가 컸던 터라 돌아오는 길에 맨해튼의 기차역에 내려서 얼큰한 순두부찌개를 먹어야 컨디션이 나아질 것 같아서였다. 원래 어딜 가든 그 장소를 꼼꼼히 스캔하는 버릇이 있기도 하고, 혼자 앉아있어서였기도 하여 식당 안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마침 백인인 미국오빠 두 명이 내 앞자리에 착석했다.
내가 미국에 살았던 2011년까지 한국식당에 오는 사람은 대부분이 한국사람이었고, 중국사람 일본사람도 거의 없었으며, 백인이 한국식당에 오는 경우는 한국사람 여러 명 오는데 한 명 뻘쭘하게 끼어있는 경우뿐이었다. 그나마도 한식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여자친구의 가족과 식사하기 위해서로 보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어서, 가족들이 이거 한번 먹어보라고 하면 공포 서린 표정으로 한 입 쪼끔 베어 물고는 "It is delicious, but I am good."(맛있지만 나는 괜찮아) 하며 미국사람으로는 최대한의 예의를 차려 말하고 어색하게 젓가락을 내려놓기 일쑤였다. 그 테이블이 썰렁해진 것은 덤이었고.
그래서 그 젊은 백인청년 둘이서만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아서 메뉴를 고르는 모습조차 내겐 신기했는데 나를 경악시킨 건 그들이 이미 먹고 싶은 것을 정해 온 듯 바로 주문하면서 한 말이었다.
"Can we have a bottle of grapefruit soju?"(자몽맛 소주 한 병 주세요)
뭐?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소주를 먹는 백인도 신기했는데, 자몽맛 소주라고? 레몬소주는 1990년대에 자주 마셨지만, 자몽맛이 나는 소주가 있을 리가. 웨이터의 반응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런 건 없다고 친절하게 말했으나 그 백인오빠 둘은 강경했다. 자몽맛소주가 있다고.
그로부터 몇 달 후에야 알게 되었다. 다양한 향을 첨가한 소주가 판매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래도 자몽맛은 흔하진 않던데. 무튼 그 오빠 둘은 제육볶음과 순두부찌개를 반찬도 한 번 먹고 밥도 국물과 같이 먹고 소주도 한 입씩 털어 넣으며 먹었다. 한국사람하고 똑같이. 한두 번 온 솜씨가 아니었다.
2021년 가을은 Covid19이 창궐하여 국가 간 교류가 끊어진 지 거의 2년 만에 백신이 나와서 각국이 조금씩 국경을 열 던 시기였다. 당시 우리는 악명 높은 국경봉쇄를 했던 대만에 살았던 터라 출국을 못 해, 2년 간 밀린 일(남편은 원래 출장이 많다)을 다 처리하느라 6개월간 이나라 저 나라에 다녔었다. 국경을 개방한 나라의 순서로. 그러다 벨기에의 브뤼셀에 머물던 어느 날, 외국에 가면 그 나라 음식을 먹는 것이 원칙인 남편이 갑자기 한식 먹고 싶다고 해서 검색해 나온 3군데 한식당 중에 제일 괜찮아 보이는 데에 전화 걸었더니 예약이 꽉 찼단다. 그날이 금요일이었던 것도 이유겠지만 예약도 안되다니.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식당에 가봤다. 5시 반에 연다고 하니 그때는 자리가 좀 있지 않을까 하고. 헐.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다섯 시 반에 식당이 꽉 차도록 유럽사람들이 앉아서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 소주를 먹고 있지 뭔가. 예쁘게 차려입은 유럽인만 가득 해 더 놀랐다. 까만 머리는 한 명도 없고. 그날 11시 반까지 영업하는데 예약 꽉 차서 더 이상 자리가 없다고 해, 남편과 나는 터덜터덜 나와 길건너에 있던 라멘집에서 기무치를 시켜 먹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건 역차별 아닌가. 한국음식을 꼭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한국사람이 한국음식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없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에 있는 한국식당에는 예약하지 않아도 자리가 있거나 조금 기다리면 밥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젠 예약도 힘들다니. 하긴 요즘은 삼겹살이나 김의 폭발적인 인기로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들었다. 저렴한 먹거리였던 김밥가격이 폭등했다고도 들었다. 이럴 수가.
지난달에 뉴욕에 갔을 때 조카들이랑 Korean Way에 있는 갈빗집에 갔었다. 올해가 2025년이니까 4년 만에 간 뉴욕.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중에서도 코리안웨이에 외국사람이 훨씬 많아서 놀랐다. 내가 맨해튼에서 일하던 2000년대 초에는 한국사람밖에 없었는데. 코로나시기에 실내 영업이 금지되자 한국사람들은 굴하지 않고 길에서 천막을 치고 포차를 운영했다는데, 갈 곳 없던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몰렸었고, 그래서 아직도 그 길이 핫하단다. 무튼 고급스럽게 인테리어를 해 놓은 갈비식당에 들어갔는데, 이럴 수가. 한국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비 오는 수요일 저녁 7시.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나, 직장인 같아 보이는 미국사람들이 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더 신기한 것은, 한두 번 먹어본 것 아닌지, 너무 익숙하게 가위로 지글지글 익는 고기를 쑹덩쑹덩 잘라서 먹는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에 한국에서 만난 외국 사람들은 식탁에서 가위를 사용하는 것이 barbaric(야만적)*하다 생각했고, 심지어 왜 손님보고 고기를 구우라고 하느냐며 불만을 표시한 사람도 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어안이 벙벙하여 둘러보니 어떤 사람은 나도 못하는 소주병에 회오리바람 만들어서 멋지게 따는 퍼포먼스도 보이기까지. 우와. 어떡해. 나 한국사람 아닌가 봐.
한국의 음식문화는 조용히 미국을 점령했다. 단시간 내에. 백 년 전에 노동자로 이민 와서 온갖 차별을 견뎌내며 정착한 중국음식은 말할 것도 없이, 1990년대에 세련된 사람들이나 먹던 일식도 날것을 먹는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기 굉장히 어려웠고, 많은 부분 본토의 음식과 다른 맛인 경우가 많은데, 한국음식은 그냥 그대로 외국인, 특히 미국사람들의 식생활에 정착한 듯하다. 코리안바비큐라면 싫어하는 사람을 못 봤고, 파티나 바비큐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은 어느 슈퍼를 가나 코리안바비큐 양념해 놓은 팩을 팔기 때문에 쉽게 집에서도 해 먹는다. 직접 만든다는 사람의 영상이 SNS에 넘쳐나고, 야외에서 캠핑할 때 한국음식 해 먹는 영상도 많다. 미국의 젊은 친구들은 이미 한국의 음식문화가 음주문화와 겹친다는 것을 이해하는 듯하다. 얼마 전, 미국인 친구들을 이끌고 한국에 '음주투어'를 떠났던 딸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고 했다. 어딜 가나 맛나고, 저렴하고(미국에 비해), 오래 앉아서 이야기하며 술을 먹어 매일 즐거운 파티였다고. 게다가 요즘은 '게장'을 먹어보고 싶다는 외국인을 많이 만난다. SNS에서 자주 보는데 어떤 맛인지 상상이 잘 안 가는 듯하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한국에 관광 온 외국인의 카드내역을 조사해 본 결과 '게장'이 당당히 3위에 등극했다고. 맨해튼에서 일하는 조카도 ㅇㅇ식당에 파는 게장이 본토맛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조카는 게장을 안 먹으니 난감하단다.
영양가도 많고, 맛도 좋고, 같이 먹으면 재미나는 한식을 그냥 그대로 우리 모두 즐길 수 있다니 너무 좋다. 한국을 떠난 지 30여 년. 아무래도 조만간 미국사람들에게서 한국에서 유행하는 음식과 술문화를 배워야 할 날이 올 것 같다. 하하하
*한국말로 '야만적이다'라고 하면 잔인하다는 느낌이 있지만, 영어로 barbaric이라고 하면 헐벗은 몸에 가죽 두르고 도끼로 짐승 사냥해서 먹는, 그러니까 문명의 반대편에 있는 신석기인 같은 느낌이다. 신의 선택을 받아 '선진 문명'을 일궜다고 믿는 유럽인에게는 엄청난 욕이지만, 현재는 인종차별적이라 잘 쓰지 않는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