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 : pretend to ~
초봄. 구별되고 싶어!
: pretend to ~
/ 여행하는 것과 사는 것
관광객 많은 곳은 안 가. 여기 사람 없어서 좋다. 로컬 맛집. 여기가 찐이다.
왜 굳이 삶을 피해 여행 온 자들은 남의 인생에 속하길 바라는 걸까. 실은 여행 중이면서.
나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관광객'스럽게 여행하는 이들을 저평가하는, 그러한 관광객과 나를 구별 지으려는 미성숙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일종의 홍대병. 남들이 하면 하기 싫어하고 괜히 기피하는 대상에 집착하려 하는. 실은 나도 숏폼과 SNS 케이팝에 환장한다. BTS도 좋아해.
이곳에 살면서 그동안 꿈꿔 왔던 'pretend to European'의 방점을 찍은 것 같아 남몰래 우월감과 뿌듯함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마트에서 대용량의 요거트를 사고 살림 걱정을 하며 단순히 일상으로 하루를 채워 보낼 때. 집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피크닉을 갈 때. 이들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수업 첫날. 나는 여전히 여행하는 아시아인임을 느꼈다. 철저히.
유럽에서 아시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임을 알았다. 새 학기 첫날의 어색함과는 다른 질감의 고립감이 나를 덮쳐 왔다. 20명 남짓의 백인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서, 단순히 영어를 알아듣는 것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그들의 언어 속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여야 하는 이 상황이.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그렇다고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냥 사람 좋은 아시아 미소를 짓는 것 밖에. 한국 수업에 몇 있던 중국인 유학생들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너희들도 이랬니. 말이라도 걸어줄걸.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네가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되지. 기분 탓 아니야? 더 열심히 해 봐.
용기 내어 건넨 나의 감정들이 여러 목소리로 귀결될 때 이는 온전히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음을 직감한다. 단순히 겉모습을 조롱하면 같이 씨발놈아 하고 넘어가면 된다. 어딜 가나 나에게 돌아오는 첫 질문이 Where are you from? North or South? 일 때 불순한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악의 없이 내뱉는 이 편안한 질문들이, 무지를 드러내도 될 대상이라는 어떠한 안도감과 '너는 우리의 일원이 될 수 없어'를 암시한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으로 잠시나마 유럽인이 된 줄 알았던 나의 착각은 일회성이 되고 만다. 물론 이는 표면적이며 한 달 살기(여행)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고작 두 달의 시간으로 이방인으로서 겪을 인생을 축소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 조심스럽다.
어느 정도 대화하다 보면 피부색과 출신을 근거로 한 편안한 안착이 그들의 말과 행동에 오만하게 묻어 나온다. 자신이 표준이고 그 외는 이에 벗어난다 듯이. 비가시적인 우위를 점해 있다는 것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진지하게 고찰해 본 적이 없기에 이 문제를 표면 위로 꺼낼 시 상당한 모욕감을 드러내곤 한다. 난 그런 몰상식한 사람 아냐. 그건 다 옛날 일이지. 나 케이팝 케이드라마 불고기 좋아해. 이때도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우선적으로 살피며 자기 검열 끝에 유쾌한 농담으로 상황을 넘긴다. 오늘도 다시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리라 다짐할 때 그들은 세계 진보와 평등에 일조한 가짜 성취감에 휩싸인다.
교수는 한국 출신이라는 나를 한국에 놀러 간 친구가 보내준 공항 사진을 자랑할 대상으로 사용한다. 영어 수업을 90% 영어로 진행하는 것으로 최대 호의를 베푼 그는 희생적인 교육자로서 자신을 뿌듯해한다. 더 이상의 개입은 개인의 몫이므로 선을 넘는 행위다. 그럼에도 엄청난 노력으로 세계적인 공항을 만들 만큼 성장한 한국의 노력을 칭찬해 주는 것만은 잊지 않는다. 그러니 너도 열심히 해보자! 어떠한 단순한 혹은 상당한 양의 노력이 모든 사람을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는 나이브한 착각은 고의적인 무지의 외면이다.
그 어떤 척들에 싫증을 느끼는 초봄. 너네도 구별되고 싶어서겠지.
다시 돌아와 비엔나 여행.
처음으로 우리의 깃발을 든 한국인들이 줄줄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가움도 잠시 나 또한 서양인들에겐 줄줄이 관광객의 일원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스친다. 불쾌한가? 씁쓸한가? 모르겠다. 성당 앞 단번에 안녕하세요를 건네며 국적을 알아봐 주는 표 판매원. 좋은 건가?
비엔나 여행 목록에 있는 꽃할배들이 다녀간 성당. 한국인을 비롯해 다국적의 사람들이 북적이고 모두들 입을 쩍 벌려 목이 꺾여라 내부를 구경한다. 예배드려본 적 없지만 허겁지겁 1유로를 내고 기도를 올린다. 괜히 영험한 기분이 들어 경건해진다. 과거 신도들의 간절함을 스테인글라스로 흡수한다. 착하게 살아야지. 하고 성당에서 나오자마자 기념품 샵의 웃긴 문구로 무장한 콘돔들을 보고 낄낄댄다.
마지막 날. 시간이 남아 들어간 또 다른 성당. 구글 맵에 성당이라고 검색해서 들어간 곳이었다. 성당은 언제 한 번 읽었던 <종교의 이유> 책으로 왜 종교를 갖는지 알겠성싶었던 자만함을 무력화시켰다.
그곳은 관광객이 몹시 드물었지만 그마저도 선을 그어 실제 예배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었다. 선 뒤에서 몰래 훔쳐본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고작 글 몇 줄로 이해한 줄로만 알았지만 이들에게 종교란 책 한 권으로 압축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서로를 돌보지 못한 한 주를 보낸 사람들이 모여 용서하고 다독이며 지난주의 평형을 맞추는 거룩한 의식. 예배의 뜻을 내비치면 어떤 조건(사진 촬영 제외) 없이 선을 지워준다. 경계 없는 이곳에서 그들은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고 있었다.
유지혜 작가의 글에 따르면 어떤 이들은 신념을 실천하는 일보다 신념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멀어지는 일을 더 뿌듯해해서 그걸 지키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간의 명백한 선을 긋는다. 분리되어 칭찬받고픈 어리숙한 마음에 계략적으로 선을 그어 타인에게 박탈감을 주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부류. 이것이 스스로를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이야 말로 지금의 내가 하고 있던 모든 '구별 짓기'였다. 아 창피해 ~
고작 글 몇 줄로 이해한 줄로만 알았던 종교인들의 삶도 책 한 권으로 압축될 수 없으며 나에겐 여행 중 스쳐갈 한 조각의 유희였을 뿐이다.
나는 삶을 살아가는 로컬이 아닌 여행 중인 관광객이다.
나도 또 척한 거였네? ㅠ
실은 늘 부끄러워서 말 못 하지만 내 등에는 'Face to your naked heart'가 박혀 있다. 진실되게 살라는 뜻..
마주하기 싫어 영영 도망쳐도 결국 날 것의 내 마음을 인정해야 끝이 나더라. 그 마음을 자꾸 잊는 게 미워서 등에 박아 버렸어.
비엔나 여행 중 만난 에곤쉴레의 <Death and Maiden> 죽음과 처녀.
미술학도가 아닌지라 그림을 보면서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하진 못하는데 에곤 쉴레의 그림들은 서사를 부여하는 마초적인 힘이 있는 듯하다.
사실 <인간실격>의 표지 때문일지도? 다자이 오사무의 이미지 보단 책을 읽으며 표지의 이마 좀 넓은 삔또 나가 보이는 말라깽이(?)를 대입해서 읽는 것이 이입에 더 용이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남자와 이를 알고서도 죽음에 다가가는 어리고 하얀 처녀. 죽음의 눈빛은 이 지독한 고통의 아픔을 알면서도 외로운 이 길에 같이 뛰어 들어줄 희생양을 갈구하고 있다. 처녀 또한 백해무익한 길임을 앎에도 이 위험한 관계의 중독적 외피를 취하고 싶은 욕망이 새침한 눈빛에 드러난다. 그게 그녀를 일으키는 유일한 원동력이라는 듯.
그녀는 그렇게 죽음이 아니지만 죽음인 척을 한다.
멋모르고 뛰어든 불구덩이는 나방을 놓칠세라 서서히, 까맣게 그녀를 갉아먹는다. 나 멋지지? 부럽지? 혹은 나 좀 살려줘. 구원해 줘. 너는 나처럼 되지 마. 이제 둘 사이의 경계는 그들조차 알 수 없다. 완전한 늪에 빠진 것이다. 죽음은 진즉 이런 단계를 겪은 유경험자다. 실은 너도 처녀와 같은 시절이 있었겠지. 그녀의 하얀 살성을 되찾고 싶었겠지.
이들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한 몸이 되었으니. 사실 사랑이라 한 적도 없어. 그런 척한 거지. 대충 껴안고 아련한 눈빛 쏴주면 사랑이라 그러던데.
어쩐지 그녀의 눈꼬리가 처연하다. 간지 나는 겉과 달리 실상은 쥐뿔도 없으니까. 하얀 그녀의 피부에 죽음의 재가 물들어 가지만 그녀는 이제 벗어나는 법을 까먹었다. 마약적 쾌락에 버무려져 잔잔하고 지루한 일상의 찬란함은 견딜 수가 없는 거지.
사랑이라 일컬을 수 없어도 그들은 철저히 서로의 욕구를 충족해 준다. 주변이 일그러져 가는 지도 모른 채 서로에게 속박된다(빠져든다).
아슬하고도 연약한 평형을 서로를 할퀴어 가며 유지한다. 그렇지만 명백히 한쪽으로 흘러간다.
결국 나는. 관광객은. 종교인은. 처녀는. 죽음은. 누구지?
뭘 뭐야. 너는 너고. 관광객도 너고. 종교인도 너고(종교인 그 자신 스스로). 처녀는 처녀. 죽음은 죽음.
처녀는 죽음이 아니고 죽음은 처녀가 아니지. 그걸 잊어선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