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 흰색 탈주극
봄. 피곤한 사람들
: 흰색 탈주극
"More than ever I have a pent-up fury for work, and I think that this will contribute to curing me."
"그 어느 때보다 저는 일에 대한 억눌린 분노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저를 치유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Vincent Van Gogh
소녀의 정의가 뭐지. 소년의 정의는.
성인 이전, 그러니까 법적인 보호틀이 아직 더 존재하는 즈음에 이들은 법의 너머를 동경한다. 금지된 영역. 이른바 성인의 전유물.
음주. 흡연. 성 (물론 너는 성인의 전유물은 아니다. 더 취약할 뿐.)
욕망의 값어치만큼 오소소 돋아난 여드름들을 뒤로하고 두터운 화장을 방패 삼아 과도한 욕지거리로 또래의 부러움을 산다. 치마는 더 짧게, 신발은 더 높이, 브랜드는 더 잘 보이게. 괜히 서로를 아프게 하는 말들로 나이를 가불 한다.
이것도 안돼? 그럼 뒷주머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들어 줄담배를 피워댄다. 술도 한 잔. 아니 병. 그럼에도 너희들의 우유 냄새는 가려지지 않는다.
'어른스러워 보이기 위해'
그렇지만 우리들 눈에는 피곤해 보인다. 걱정된다.
영화 <Mean Girls> (금발이 너무해) 속 미국 틴에이저들을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우.. 피곤하겠다. 저 때부터 저렇게 날 것의 정치권력, 사회, 사랑을 쟁취하려 매 순간 매 초 노력하려면 참으로 피곤하겠다. 우정은 언제 쌓니? 놀이터가 서 언제 놀아? 라떼는 .. 별다를 게 없구나. 쩝
시리즈 <Sex and the City>의 <Childhood> 에피에서도, 사만다는 벌써 돔 페리뇽을 선심 쓰듯 선물하고 게걸스럽게 남자친구 얘기를 하는 거대한 파티를 13살을 위해 열어줘야 했을 때. 처음에는 패배감을 느꼈지만 이내 13살부터 참전해야 했던 피곤한 전투에 불쌍함을 느낀다.
다 가진 13살이 가지지 못한 것은 Childhood.
여기 유럽 틴에이저들은 16살 때부터 담배와 술에 노출된다. 한국식 나이로 하면 18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어린 나이다. 길에서 흔히 담배와 술을 마시고 있는 어린이(?)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참으로 안 멋지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도 그래. 싱클레어.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생각하면 안 피곤하냐? 나중에 그런 척할 시간은 차고 넘쳐. 어른스럽지 않고 싶어도 해야 할 시간들이 올 거야. 애처럼 굴지 말라고 말이야.
예를 들면 이런 것. 이게 싱클레어의 평소 대화 내용.
'개인의 가치는 도대체 어딨죠? 우리 안에 모든 것이 이미 다 준비되어 있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우리는 계속 노력해야 합니까?'
'내면에 세계를 지니고만 있는 것과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엄청 달라! 그들이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반대로 나무나 돌, 기껏해야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네. 그러나 이 인식의 불꽃이 최초로 번쩍 빛나는 순간, 그는 바로 인간이 되지. 자네도 저기 거리를 걷는 모든 두 발 달린 족속들을, 단지 직립보행을 하고 자식을 열 달간 배 속에 넣고 다닌다는 것만으로 인간으로 생각하지는 않겠지. 얼마나 많은 이가 물고기나 양과 같은 존재와 불과한지! 물론 그들 각자가 인간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는 있지만, 스스로 예감하거나 부분적일망정 자각해야만 그 가능성이 비로소 자기 것이 될 거네.'
이거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토론하던 내용이라고 싱클레어야. 안 피곤해?
그럼 이런 생각들은 성인의 전유물일까. 성인이 된다고 이렇게 사유하나? 오히려 청소년기의 공백에 생각의 씨앗을 심어두는 편이, 성인이 되어서도 원동력이 되어주지 않을까? 중2병이라는 조롱 아래 얼마나 많은 싹을 잘랐을지. 불필요한 화장을 하고 술을 입에 대고 담배피며 무의미한 욕을 지껄이며 피곤하게 사는 대신 이런 감수성의 피곤함을 존중해 왔더라면 대학교 3학년의 토론 수업은 한결 더 깊었을지도 모른다.
카프카의 삶도 참 그래. 아버지 말대로 변호사가 됐으면 그냥 순응하고 살던가. 아님 반항해서 관두고 연 끊거나 설득해서 다른 직업 찾음 되지. 왜 그 괴로운 스탠스를 고집하며 조각남에 몸부림치고 몸부림쳤을까. 그토록 섬세한 사고체계로 몸부림에 머물지 않고 글로, 이야기로 고통을 토해냈을까. 참으로 피곤하게. <변신>을 포함한 그의 결과물들은 대부분 아버지와의 갈등, 변호사 하기 싫어 죽겠기에 오는 괴로움에서 기인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논문 쓰기에 한창인 룸메가 하기 싫다고 불평을 하다 이런 얘기를 한다.
슬퍼. 근데 슬퍼서 좋아. 안주하고 싶지 않아. 여성이 임신한 전후로 뇌피질이 어쩌구 어떻게 바뀌는지 누가 신경 쓰겠어. 모르면 편할 텐데 자꾸 피곤하게 들추게 돼. 실험 결과가 요상하게 나왔으니 여기 멍청하게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거지. 출산한 여성의 뇌가 물리적으로 둔감해지고 다른 영역의 지능이 활성화된 것을 안게 뭐가 달라지나? 달라지지. 그 말은 출산한 여성과 그 밖에 사람들을 같은 출발 선상에 두는 게, 갑자기 애를 낳자마자 일에 복귀하는 게 공평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된 거잖아.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아버린 거잖아. 남자의 기준에 맞춰져 있다는 걸 안 거잖아. 이제 너랑 나는 취집 가서 편하게 살거나 출산휴가 쓰고 다시 돌아가면 되지라는 말을 그냥 못 뱉는 사람들이 된 거지.
사유하지 않고 체제에 순응하며 살면 행복해. 반면 내 삶은 처절해. 그래도 난 그들처럼 되고 싶진 않아. 안일함 개나 줘. 진실이 저 너머에 무한히 존재한다는 걸 안 이상, 평생 피곤한 삶을 사는 수밖에. 재밌잖아?
요 피곤한 사람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반면에 나는 그냥 피곤한 사람. 하움..
한국에서 과제하면서, 일하면서 읽을 당신들에겐 미안하지만, 복에 겨웠지만. 나 정말 행복한데 동시에 피곤하고 집에 가고 싶어.
실은 나, 여기서 배우는 게 없어. 세계 여행자가 아니라 교환학생 신분으로 온 건데 수업에서 얻어 가는 게 단 한 개도 없다? 홍대 수업이 그리울 정도야. 무슨 어린이 책을 읽고 위키피디아 마냥 책 소개를 애들 앞에서 소개해야 하는 건데 이게 뭐람. 내 생각이나 하다못해 독후감도 아니고 정말 나무위키 정도의 정보야. 교수가 수업을 안 해. 다른 수업은 자유주제를 가져와서 토론하는 건데 이것도 뭐. 교수가 전혀 개입을 안 하니 카페에서 애들끼리 얘기 나누는 수준. 과제도 없고 시험은 있지만 뭔 문법 문제래. 그것도 동의어 연결. 참내. 내가 공부를 안 한다고 불평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내 동기들은 친구들은 교생도 나가기 시작하고 인턴도 나가고 취준 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나는 이 먼 타지까지 큰돈 주고 와서 흥미 없는 여행을 이어나가는 게 참 피곤한 거지.
나는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이 존재 증명에 실패할 때야. 내가 대체 가능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 무의미. 무능력. 무사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글을 쓰지 않을 때의 거대한 공허함이 너무 무서워. 내가 글을 멈추는 동안, 그러니까 사유를 멈추는 동안 밀어 닥쳐올 무지의 무게가 무거워 다른 과제들 보다도 의무적으로 책을 읽고 신문을 읽고 영화를 봤던 것 같아. 멍청해지는 기분 정말 싫어. 그렇게 머물러 있으면 사람들이 막 조롱하는 것 같아. 너도 뭐 별거 없네. 평범한 사람. 나는 일생을 너무도 안 평범한 사람이랑 살아와서 상대적으로 늘 묻혀왔거든. 그래서 더 악착같이 집착했던 거야. 그게 패션이던 취미던 글이던 직업이던 뭐든. 그게 습관이 되다 보니 몸에 굳어지고 자꾸만 벽인 줄 알았던 문을 여는 재미에 (어찌 보면 더 열어야 할 문이 있다는 걸 안 집착에) 손을 놓을 수 없었어.
근데 여기 와서 그게 탁. 끊긴 거지. 발전을 못하고 있는 내 상황이 너무 초조하고 화가 나서 나 스스로를 괴롭히고 자책하고 있어. 기분 좋은 여행을 와도 괴로워야 한다는 죄책감과 복에 겨워서 이러고 있다는 몇 없는 타자들의 시선을 억지로 뜯어와서 나한테 붙여놔야 안심되는 것 같아.
알아. 피곤하지. 복에 겨웠지.
왜 큰돈 주고 여행 와서 좀 생각 없이 즐기지. 예쁜 거 보고, 쇼핑하고, 파티 가고, 공부 좀 끄적이다가, 술 먹고 약도 가끔 해. 그럼 되잖아.
나로 태어나서 나로 끝나는 인생의 공허함이, 그 허무가 나를 좀먹는다. 마치 다음 소비재를 고르다 끝나버리는 방대한 넷플릭스 미로 같다.
최대한의 내가 되고 싶어.
그래서 이 작품들을 마주할 때 나는 그만 겁에 질렸다. 불에 매혹되어 타 죽어버리는 나방에 대척하여 끝없는 無의 하얀색에 빨려 들어갔다. 블랙홀 같은 사운드와 함께 이 첫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단단한 껍질을 찢고 고통의 진실로 나아가기 직전의 병아리가 된 기분이었다. 틈이 있는데, 그 틈새로 무언갈 봤는데 나가기가 무서워. 근데 나가야 해. 어쩜 좋아. 기분 나쁜 붕 뜬 불안함.
다음 작품. <데어 데블>을 본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타노스 같은 악당 킹핀이 이런 작품을 한없이 바라보며 정답 없는 불안한 미래에 안정감을 얻곤 한다. 나는 반대로 <도깨비>에서 무한한 설원을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끝없이 헤매야 하는 공유의 심정에 이입한다. 마치 4년 전 터키 공항에서 길과 비행기를 잃고 목적지 없이 몇 시간을 방황해야 했던 그날의 망연자실처럼.
다음 작품. 이게 진짜 무섭다. 설원의 그림자마저도 앗아가 버린 정통의 無.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흰색.
No hierarchy. No ambiguity. No illusion.
블랙홀도 끝으로 몰아내 버린 탐욕적인 깨끗한 흰 배경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내 상황 같아서. 곧 들이닥칠 내 미래 같아서.
한동안 그 전시장에서 나갈 수 없었다. 나가고 싶어도 쉬이 나가지지 못했다.
미술관에서 나온 나는 급격히 피곤해졌다.
그리고 반 고흐 박물관. 반 고흐라는 사람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총체적인 이해를 도왔던 큐레이팅 덕에 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결국 그도 참 피곤한 사람.
늘 정신적 고통과 분열에 시달려 자기 자신과 싸우느라 그 밖을 돌보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뭐 모델 살 돈이 없어서 자화상을 그렇게 많이 그렸다지만 내가 보기엔 끊임없이 스스로를 기록하는데 매진한 것으로 느껴졌다. 자화상의 방이 따로 있었는데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전부 이질적인 모습이었고 실제 사진과 절친 고갱이 그린 그림을 보니 또 완전히 다르게 생겼더이다.
종이 인형처럼 납작하고 밋밋하게 그려놓은 얼굴부터 강한 선과 윤곽에 어두운 배경까지 더해져 입체적인 얼굴까지.
중간에 귀를 자른 직후의 자화상이 있었는데, 그 그림은 유독 선이 정확하고 인상이 강렬하여 귀를 자른 사건이 그로 하여금 선명도를 부여한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뒤에 양면으로 그린 그림을 보면, 또 그 후의 지속적인 그림들을 보면 대체로 긍정적인 시기에 얼굴이 단순화되어 간다.
그림 속 윤곽과 음영에 비례하는 고독의 실제성을 엿본 셈이다. 귀를 자르고 그의 삶은 더 비참했던 것이다. 속의 곪아가는 비참함을 그림으로라도 토해내 치유의 빛을 꿈꿨던 거지. 그게 그만의 방식이었다.
"I am not indifferent, and in the very suffering religious thoughts sometimes console me a great deal."
"저는 무관심하지 않고, 고통받는 종교적인 생각들은 때때로 저를 크게 위로합니다."
일생을 억눌린 분노에 대항하여 또 이를 소재 삼아 치료로써 배설해 낸 그림들. 그게 그의 가치였다.
이런 미친 귀 자른 인간. 그렇다고 귀를 자를 것까진 없었잖아요. 아프게. 아프고 피곤하게.
아니. 이렇게 해야 그는 살 수 있었던 거다. 그는 억눌렸지만 그 분노에 깔려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분노가 그를 살린 셈이다.
더 이상 이를 이어나가지 못하겠다 판단이 섰을 때 살아내지 못한 것이다.
이 피곤한 당신들과 나의 차이는 억눌린 분노, 아니 피곤을 해방할 줄 몰라. 아름다운 구토를 할 줄 몰라 또 피곤해. 그냥 구토는 가끔 하지롱. 그래도 이 블로그가 그나마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이 귀찮은 나를 조금은 좀먹는 사유들이 나의 거름이 되는 날이 오겠지? 온다고 해. 나도 꽤 쓸만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날이 오겠지. 계속 피곤하게 살다 보면. 그 피곤을 미워하지 않다 보면.
정보라의 <고통에 관하여>를 읽다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 사이비의 운영 비결은 잠 못 자게 하고 밥 굶겨서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게 일 순위다. 후에 이미 피곤한 사람을 괴롭히고 협박하며 겁을 주다가 조금 친절하게 대해주고 먹이고 쉬게 해 주면 이는 '은혜'로 탈바꿈된다.
실은 한국 사회도 거대한 사이비 집단이나 마찬가지다. 잠도 줄여가면서 엄청나게 열심히 살지 않으면, 남들처럼 내신 잘 보고 수능 잘 보고 좋은 대학에 스펙에 해외 연수를 하지 않으면, 죽도록 노력해서 정규직을 달지 않으면. 평생 비정규직에 서울도 아닌 어딘가에서 모두에게 무시당하고 친구도 없이 독거노인으로 폐지 줍다 백세시대에 쓸쓸히 죽을 거라는 공포. 무한한 '-하지 않으면'에 속아 자기 자신을 지독하게 채찍질한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면서 뭐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여간 열심히 살고 대열에 합류했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개미들. 그렇지만 실은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교주든 교수든, 이 거대 세력에게 잘 보여서 독립된 주체로서의 존엄과 사유 감정 경험 다 짓밟힌 채 체제에 순응하는 게 답이지.
이럼 편하잖아 피곤하지도 않고. 뭐 육체적으로는 피곤하겠지.
결국 사람들은 개처럼 노력해서 자신의 가치관 하나 가지지 못한 상태로 행복하게 병들어 간다.
싫어. 그렇게 안 살래.
피곤을 통해 우리는 불편을 마주한다. 아 피곤해.. 모르고 싶어.. 그게 편한데. 이미 충분하다는 뽀송한 착각이 구체적일 수 있는 사랑을 추상에 머물도록 경계 짓는다. 조금 더 피곤하게 살뿐인데 더욱더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손쉬운 외면을 배신한 선두주자들은 경계에 서서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낙관적 보편의 흰색에 자신의 피로를 배설하면서. 이 이질성을 맘껏 느끼며 피곤하게 살아야지 뭐 별 수 있나.
싱클레어가 중딩 때 진즉 안 사실이야. 다른 길을 일단 발견하면, 더 이상 다수가 가는 길로 함께 가기는 글렀지.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 세계를 인식하는 법은 치열하게 낡은 자아의 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방법뿐이야. 지름길은 없어.
아놔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요. 이걸 다 읽은 당신은.. 피곤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