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 거울을 팔아 창문을 사자
초여름.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거울을 팔아 창문을 사자
* 이번 글은 베를린부터 포르투갈, 모로코로 이어진 여름 여행에서 이어진 조각들입니다.
@ 베를린
베를린에 왔다.
혼자 여행하니 함께 여행할 때 포착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면. 지하철에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울고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친구야, 괜찮니?'라고 물어주는 도시.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덥석 안고 마음껏 엉엉 울게 되는 도시. 길거리 악사의 쉬는 시간 맞은편에 덜컥 앉아 대화를 청하는 도시. 늘 헤매고 있으면 먼저 다가와 안전을 확인해 주는 도시. 그런 쿨함에도 신발이 예쁘다는 칭찬 한마디에 볼이 새빨개지는 순수함.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거리낌 없이 그것을 쳐다보고 관찰하며 웃음을 보이던 걱정을 하던 참여에 몸을 내던진다.
1호선의 지하철이 생각난다.
베를리너들은 투명 인간이 아닌 무지개색을 한 인간들이었다.
물가에 너 나 할 것 없이 앉아 맥주와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들에게 비치는 핑크 노을은 사진의 배경이 아닌 현재를 값지게 만드는 일부분이다. 전시 관람도 마찬가지.
A는 A, B는 B. 솔직하고 순수하다. 두 번째 이유를 스리슬쩍 드러내지 않는다.
이곳에서 그들의 아름다움을 증거로 내놓는 경우를 자주 목격했다.
그들의 인스타그램을 알지 않아도, 대화를 해보지 않았어도. 그들이 나와는 다른 (닮고 싶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충분했다.
증거물 2호.
베를린의 명물 클럽 킷0에 방문했다. 일탈을 느껴보고자 간 그곳에서 어쩐지 혼쭐을 당하고 왔다.
자유의 상지인 베를린의 '상징' 클럽인 만큼 그곳은 입장부터 까다롭다.
평범함, 지루함, 예측 가능성은 모두 가차 없이 입뺀.
미안하지만 백인 여자친구를 데려온 백인 남성이 가장 많은 입뺀을 당했다.
휴대폰 사용조차 금지된 그곳은 마치 영화 <바빌론>의 한 장면 같았다. 물론 여성과 남성에게 부여되던 옷을 다 집어던진 것이 차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강렬한 음악과 의상 속에 참여한 당신에게 지금 이 시간과 공간만큼은 모든 무게로부터 자유로움을 약속받는다.
감히 예측할 수 없는 옷과 성별 아래 매혹적인 춤을 추는 그들을 보며 나는 빠져들었다.
이렇게 만치 한 사람이 내뿜을 수 있는 에너지와 욕망의 표출선이 다양한데, 남자/여자 남성스러움/여성스러움 남자+여자 단지 셋으로 억만 년의 시간을 분류해왔고 현재도 그 경계를 굳건히 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진짜 의미 없다.
왜?
이들의 몸짓을 한 번이라도 봤으면. 한 단어로 정의 불가한 이 아름다운 몸짓들을.
그 몇 개의 단어들은 이들 앞에서 맥을 못 추린다. 기에 눌려 단순 활자의 초라함이 바로 들통날 거야.
3월 글처럼 나는 신념을 실천하는 일보다 신념 바깥이 있는 사람들과 멀어지는 일에 더 집중했었다. 진실로 그들을 존중한다기 보다 어쩌면 이론적으로만, 그것이 더 지적으로 보이기에 다툼과 비교를 자처했었다. 하지만 타인에게 박탈감을 주는 결론이 이 다툼의 끝이라면, 어떤 주장이었든 건강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건 그런 척하기 위해 그들에게서 훔쳐 먹은 삶이었다.
그들은 왜 자신이 단순히 남성으로 정의되지 않는지, 누구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지 다투거나 자랑하지 않아도 내게 흡수시켜 주었다.
신념을 재단하지 않고 각자의 보석을 신뢰하는 것이, 그 실천이 얼마나 강력한 지 그들의 방식으로 알려주었다.
베를린에서 구했던 동행 H는 어린 나이였지만 대단한 행보를 가진 사람이었다.
가장 원했던 대학에서 떨어지고 재수나 하위 대학 대신 돌연 필리핀 유학을 결정했던 그는 독일 공대 진학에 성공한다. 벤츠 인턴십이라는 선망의 길이 주어졌음에도 경험에 갈망을 느껴 승무원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단 한 선택에도 가벼움이 느껴지지 않았던 그는 되려 서울에 갇혔던 이 지루한 내 삶을 존중해 주는 겸손을 엿보였다. 그러면서 베를린을 동경하는 나에게 덧붙였다.
'이 도시는 고여서 별로예요. 재미없어.'
사는 사람은 모르나 보다. 단순 여행객으로 만났던 다른 동행은 서로 베를린 칭찬하기 바빴는데.
고유한 자신을 뽐내지 않아도 건강한 아우라를 발광하는 그들의 체화된 오랜 삶의 태도가 제3자의 눈에는 보였다.
정착하면 닮아가나 보다. 자신이 얼마나 다정해지는지 인식조차 못 한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니까.
이 도시의 유행은 바로 이 건강함이다.
발레 코어나 아디다스 삼바, 핀터레스트 감성이 아닌 타인의 아름다움을 몰래 신뢰하는 다정함. 암묵적 신호로 기어코 실천하는 무지갯빛 연대.
@ 포르투갈
살면서 그런 순간들이 있어.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나 싶은.
삶의 한 장면이 너무 영화 같아서. 영화가 시시해지는 그런.
근데 그런 순간은 나에게 어느 순간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거야.
계획에 쫓기지 않고, 생각에 쫓기지 않고,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 내가 놓치고 있던 찬란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
그럼 그때 나에게 '그' 순간이 찾아와. 사실 내 속에서 나오는 거지. 나로부터 발현되는 거야.
리스본. 참 좋다.
에그타르트가 맛있어서도 이지만. 잊고 있던 나를 찾게 해주는 마법 같은 곳이야.
초여름. 미라 도루 공원에서
'나'는 인물이든 작품이든 현상이든 뭐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을 좋아한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를 풀고 덮인 수풀을 제쳐 정확한 원인에 대면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로 인해 그 상대를 더 깊이 이해, 공감하고 '나'를 대보며 비교. 성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더 나아가 내가 알아낸 이 진귀한 진실들을 나의 언어로, 또 하나 열린 내 세계와 교감하며 글 혹은 말(글이 더 좋다)로 풀어내길 사랑한다.
재밌다.
인간에 대해, 천재에 대해, 그들의 예술적 삶의 포효를 같이 걸어가는 것이 퍽 즐겁다.
끝없이 탐구하고 알리는 것.
그래서 영화를, 책을, 미술을 사랑해.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해.
근데 잠깐 착각한 거지.
난 창작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었던 건데, 얘들을 넘 사랑하니까 근원에 동참하고 싶었던 마음이었어.
오늘 선택한 커피 한 잔으로도 인생의 흐름이 전혀 달라진다는 게, 너무 흥미롭고 궁금해서 가슴이 떨려.
단 한 명도 똑같은 사람이, 사연이, 산출이 없다는 게.
내가 평생 흥미를 잃지 않고 살아갈 이유인가 봐.
홀가분하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알았어.
초여름. 포트와인을 마시며 포르투 전망대에서
Thanks to J, H
(전 글에서 내가 쫌 무섭다고 찡얼댔지? 이제 암오케)
미디어 속 세상은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줄여 놓는다. 간접경험, 이를테면 쏟아지는 미국의 이미지들을 보고 미국을 전부 아는 양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뉴욕의 이미지라면 <섹스 앤 더 시티>,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스파이더맨 홈커밍>, 인스타그램의 이미지 등등 수도 없이 습득했고 그려낼 수 있지만 실제로 그 공기를 느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미지들의 포만감에 나는 실재를 마주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점점 가상화는 실재를 투명하게 지워나간다.
이미지는 현실이 제거되는 만큼 아름답다. 귀족적인 성품과 지성을 표현하고 싶다면 랄프 로렌을 풀 착장을 입어주면 되고 행복한 삶을 내보이고 싶다면 당장에 꾸며진 사진들을 연출 후 업로드하면 소문은 자연스레 퍼진다. 이미지들과 나를 비교하다 보면 나에게 없는 것은 왜 이리 많은지.
나는 왜 그 대학에 떨어졌지? 왜 나는 여행 갈 돈도 없지? 왜 나는 애인이 없지? 왜 나는 저런 명품을 사주는 사람이 없지? 왜 나는 아직도 졸업을 못하고 취업도 못하고 있지? 왜 나는 집이 없지? 왜 나는 로고를 내보이고 싶은 차가 없지? 왜 나는 물려받을 집조차 없지? ...
미디어 내 보편적인 현실들은 평생 따라잡을 수 없는 무한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지름길을 욕망한다. 일상의 연출에 동의하며 가상의 지위를 쫓는다. 더 멋진 나를 포착하는 것이 실제로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는 것으로 동결된다.
나 아닌 다른 눈이 있는 곳에서 삶은 프레임 밖으로 서서히 밀려난다.
미디어에 접속하면 이미 가진 것들을 까맣게 잊게 된다. 내가 이뤄온 업적 혹은 가진 것이 이루지 못한 것, 가지지 못한 것들에 압도적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 공허한 가상세계를 뒤쫓다 남는 것은 본질이 텅 비어버린 거울 속 자신이다.
거울은 밖으로 순환하지 못하고 자신과 자신의 잣대 속에 처절히 소모되어 간다.
가짜 이미지에 지친 사람들은 다른 자연스러운 이미지로 피신하는 데 그친다.
거울이 아닌 창문이 필요하다.
거울인 줄 알았던 창문. 세상 밖을 보여주는 거울.
그러니, 세상 밖으로 나가자.
바깥의 불규칙한 돌기들은 너를 마모시키지 않고 되려 쿡쿡 찔러 숨은 너를 깨운다.
그 저항성에 상처가 날지라도 남이 보기에 매끄러워 보이는 원이 아닌 나의 고유한 조각을 빚어낼 수 있다. 면역을 지닌 자에게 타인의 정의는 우습다. 그저 묵묵히 실천할 뿐.
@ 모로코
아무것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사막은 생명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낙타의 부유물로 길을 유추해 볼 뿐.
그마저도 꾸준하지 않으면 모래에게 잡아먹힌다.
세상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돼.
다들 사막하면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지.
끝없는 모래. 낙타. 오아시스. 듄. 뭐 이런 거.
직접 부딪혀 본 사막은 이제 나에게
흔적. 오렌지. 야야. 사람. 달. 와인. 물. 박효신. 토끼. 인내. 배려.. 등등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던 것들 투성이야.
나처럼 교육학과를 다니다 우연히 방문한 콘서트에서 음향 일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
축구를 사랑해서 스페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왔다가 오히려 더 사랑하게 된 축구선수.
꼭 하던 것을 던져버리라는 게 아니야.
넓게 펼쳐진 나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해 본 이들의 경계는 흐려지고 윤곽은 뚜렷해져서 마모될 수 없는 건강함을 몸에서 뿜어낸다는 거지.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전보다는 안락함, 보람보다는 돈에 손을 드는 것이 망설여지지 않는 날이 올 거야.
하지만 그 결정들이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의 흉터라는 것을 알아. 모두는 아니겠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저쪽에 손을 들어주지는 말자. 가오가 있지.
악의 없는 '니하오'를 '니하오'(반가운 인사)로 웃으며 받아칠 수 있는 여유로움이 그의 치열했던 삶을 가늠하게 돼. (여행 꿀팁!)
이미 싸워본 자들만이 갖고 있는 단단한 우아함이 우리를 위에서 보호해 주고 있어. 그러니 그 울타리 안에서 안심하고 망나니가 되어보자.
이 글을 읽을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들아.
우리는 아직 젊고 어려.
대신 무얼 해왔던 아직 부족해.
덕분에 완전함으로 걸어갈 모험 퀘스트가 주어지는 거지.
그러니 가진 것에 집중하고 밖으로 나와 삶의 찬란함을 함뿍이 느끼자. 같이.
상처를 털어내고 도착할 목적지는 미움이 아닌 더 큰 사랑, 더 최대한의 '나'.
달을 찾으려면 밤의 한가운데로 가야 한다는 내게
너는 바다에서만 헤엄칠 수 있는 건 아니라 했고,
모든 얼굴에서 성급히 악인을 보는 내게
사랑은 비 온 날 저녁의 풀 냄새 같은 거겠지 말했다.
우리는 보폭을 맞추며 씩씩하게 나아갔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온갖 종류의 그리움 같아 내가 말했다.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나는 비로소 내 오랜 악인에게 생일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