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 외롭지 않은 카페오레
한여름. 속옷 갈아입는 여자
: 외롭지 않은 카페오레
* 이 글은 2024 제15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대상작 <이응이응>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출발한 글입니다.
- 속옷 갈아입는 인간
개정되지 않은 <이방인> 본편에는 '속옷 갈아입는 인간'이 등장한다.
뫼르소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자신에게 그런 판결을 내린 자들이 '팬티를 갈아입는 인간'이란 사실에 치를 떤다.
(책 속의 정확한 표현은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이 내린 결정은 신뢰할 수 없다.
그래서 뫼르소는 자기 엄마가 죽었을 때 울지 않고 카페오레를 마셨다.
소설 <이응이응>에서는 속옷 갈아입는 인간을 '이응이응' 이용자와 동결시킨다.
"나쁘고 안 나쁘고를 떠나서 그게 사람인 거야. 그게 이응이야."
'이응이응'은 인간이 직접 오르가슴을 설계하여 체험할 수 있는 기계이다. 취향, 코스, 역할, 정체성 모두 커스텀해서 완벽한 오르가슴 추구가 가능하다. 이응이응이 보편화된 소설 속 세계는 하나의 유토피아 같다. 돈으로 사람의 육체를 사고파는 매춘이나 원치 않는 임신, 온갖 질병의 위험에서 벗어나 청결하고 합법적인 공간에서 건강하게 욕구를 해소한다. 바야흐로 로맨틱의 시대. 혼인율은 줄었지만, 우연과 충동을 배제한 출생률은 오히려 S자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상승했다. 범죄율은 물론 재범률도 현저히 '이응이응' 덕에 줄어들었다.
참으로 우리가 바라는 세상처럼 보인다. 근데 그럼, 좋아?
거리의 청소년들은 레시피를 공유하듯 커스텀한 코스를 공유하고, 공원의 사람들은 배드민턴을 치며 이응이응 얘기를 한다. 더 이상 주머니에 숨긴 칼처럼 억눌린 성욕을 더 억누를 필요가 없다. 이응이 다 알아서 해결해 주니까. 들어가서 시작버튼만 누르면 되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이응이응의 상용화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기계를 불태우는 것으로 시위에 목소리를 높인다. 성의 비인간화와 시험관아기의 무분별한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소리치면서.
이들은 대부분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 든 남자들이라고 소설에는 나와있다.
우리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을 단순 태극기 부대처럼 간주할 수 있을까?
글쎄요잉..
존재증명이 실종될 위기에 처한 이들이 무엇을 못하겠는가. 시대의 변화를 부정하는 존재로써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그 시대를 정통으로 겪은 이가 기억하는 생명의 소중함 또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속옷 갈아입는 인간은 신뢰할 수 없다'
이들은 외로운 사람.
(지금부터 빤스 얘기가 많이 나올 텐데 비유라는 점. 양해 바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차원적인 맞닿음 최전방에 있는 건 바로 속옷이다. 이 속옷이 접촉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작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애써 자리 잡은 우리들의 서사를 계속 갈아입는 건, 휴지통을 비우는 것을 넘어 휴지통 마저 바꾸겠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이응이응에 내맡긴 편리한 삶은 축적되지 않고 얕게 찰방 인다.
파리의 한 전시 공간은 다양한 패브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이했던 점은 '만지지 마시오' 대신 쓰여 있었던 '젠틀하게 천을 다뤄주세요'라는 문구.
나도 모르게 그 패브릭을 콕 찌르는 순간 발광하던 빛과 소리는 내 집중을 완전히 빨아갔다.
마치 아바타의 세계에 접속하듯 패브릭의 물결을 손으로 따라가면, 쫓아오는 소리와 빛이 실 한 올 한 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전시장에 있던 사람들의 접촉음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은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할 정도로 가히 장관이었다.
그렇지만 손을 떼면 그 즉시 빛과 소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 직접적인 맞닿음이 패브릭 너머 세계의 연결다리인 것이다.
이색적이고 침입적인 물질들이 모여 불편함을 뚫고 성장해 하나의 뿌리를 내리지만, 이 꽃은 터치를 통해 비로소 이야기를 발화할 수 있다.
다른 모습의 물질들을 가로막고 하나의 실로 이케아 러그(하나의 완성)를 대뜸 턱 가져오면 하나의 음밖에 내지 못한다.
깔끔하지만 풍성하지 않고 조화랄게 없으니까. 대한민국 고양시에서 산 물품은 핀란드 어느 시골마을에서도, 파리 한복판의 식당 화장실에서도 같은 소리를, 같은 서사를, 아니 정보를 낸다.
이들을 만질 필요가 있을까? 이미 다 아는데. 다른 집들의 러그로 갈아 끼워도 상관없다. 채워진 고유함이 없는 똑같은 공산품이니까.
6월, 7월은 바다가 있는 곳들을 참으로 많이 돌아다녔다.
제주도부터 해서 꾸준히 바다 수영을 해왔는데, 수영장이 주지 못하는 어떤 중독적인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특히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지역의 흐바르 섬을 잊을 수 없다.
조금은 식욕을 돋우는 맛있는 바람. 일렁이지만 부드럽게 날 안아주던 짭조름한 바다. 과녁 없이 느껴지던 힘찬 발길질들. 안내의 목소리로 내리 꽂히던 빛. 그리고 생명들.
피부로 닿는 살성의 촉감이 나의 오감을 자극한다.
짠 바다에 둥둥 누워 생각에 빠지다 보면 수면과 나의 경계는 흐려진다. 무중력 속에서 나만의 세계로 잠영하게 된다.
바다는 늘 자기만의 방을 마련해 준다.
이응은 맹목적인 욕구를 희석해 주는 일회성의 에어백일 뿐 완전한 만족감을 줄 순 없다.
정해진 단계에 따라 순순히 쾌감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내맡겨진 상황에 자의든 타의든 예정된 감각에 몰두하고 싶지 않다.
자족성이 결핍된 인간은 신뢰하기 힘들다.
아날로그를 배척한 대가는 경탄의 상실이다. 모든 것을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 그 아우라를 잃어간다. 과잉 노출된 이미지 속에서 타인의 다름은 강탈되고 같은 상품으로써 소비재로 전락한다. 이 상황에서 '나'를 보존하는 것은 쉬운 일일까.
소설에 따르면 팬티를 갈아입는 인간이란 함부로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외롭지만 이 또한 선택의 대가로써 뫼르소는 자기 엄마가 죽었을 때 울지 않고 카페오레를 마신 것이다. 외로운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이의 외로움은 눈물조차 내보일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건 바다에 누울 때 차단되는 외부의 소리. 고요하지만 부지런한 물의 음. 제멋대로 상상하는 바다 아래 마을. 가늠해 보는 물고기의 이름들.
나를 잊게 해주는 느리고 모호한 쾌감은 되려 안전하게 나를 열어볼 수 있도록 돕는다.
기계와의 소통에서 얻을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고유의 행동은 욕구에서 출발해 경험에서 추억으로 까지 힘이 닿는다. 이 추억은 자아가 외부로 향하는 창을 열고 닫을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여기서 추억은 원동력으로써 오르가슴으로 치환된다.
갈아입은 팬티 입은 몸으로 포옹해 봤자 외로움만 가중되는 거지.
행위 자체보다 그 상황과의 교감, 공기 냄새 기억들이 모여 삶이 된다.
내 근원을 욕구해결로 본다면 동물과 다를게 뭐냐라고 항의할 수 있지만 속옷 갈아입는 인간의 실상은 동물보다 못하다.
동물은 그 욕구의 해결을 자연에게 힘껏 내던져 속옷 한 장 도움 없이 듬뿍이, 아주 열렬하게 해내고 만다. 그들은 고유하다.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가득 모인 기억과 추억들을 흩으리는 과정을 죽음으로 본다면.
뭉친 근육을 풀듯이 우리의 감각, 고인의 냄새와 맛, 주름이 남아있다면 이는 시원한 이완일 뿐 별 것 아니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풀어낼 것 없이 그들이 뭉쳐있지도 않다면 죽음을 능가한 종말의 도래이다. <코코>의 주인공처럼 살아있는 자들 사이에서 '나'로 기억해 주는 이가 있어야 우리는 적어도 계속해서 속옷을 갈아입지 않고 영생을 누린다.
기억되는 것이 없다면 살아도 산 자로 보기 힘든 껍데기와 다를 바 없다.
6,7월은 동시에 많은 이별을 한 달이었다. 둥지 틀었던 곳을 떠나면서 만났던 인연들을 보내야 하는 일이
단시간 내 잦은 이별을 하다 보니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이별을 이뤄내지 못한 듯하다.
본래 내 관념 속 이별은 꽃다발과 손 편지, 기다란 회포와 진한 포옹. 일전에 이렇게 큰 이별들을 겪은 적이 없어 그런가.
생각보다 준비에 미숙했고 닥쳐오는 이별들을 실감하기에 급급했다.
간단한 인사. 약간의 포옹. 짧은 문자. 혹은 이마저도 없던 건조한 이별.
내가 사실 로봇이었던 걸까.
아니면 실감하기엔 일러서 늘 그랬듯 '다녀왔습니다'를 외치며 다시 이들에게 둘러싸일 수 있다는 안일함에서인가.
모르겠다.
벨기에. 크로아티아. 멕시코. 대전.
단순히 동대문구에서 송파구로 옮기던 이별 스케일이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비약해 어벙벙할 수도.
그럼에도 이들과 공유했던 순간들이 사라지지 않음에 의심이 없고 그때의 순간을 후회 없이 누렸기 때문에 그런 거라 믿어보자.
그래도 빤스를 아예 안 입으면 숭하니까.. 우리 집 까미랑은 차별화를 둬야 하니까.. 입긴 해야지
우리 까미는요
아주 작아요. 근데 성질이 너무 커요. 자기가 사람인 줄 알아요.
근데 사실 자기가 작은 강아지인걸 아니까 커다란 세상이 무서워서 더러운 성질로 방어하는 거예요.
큰 개건 작은 개건 앞에서 엄청 짖는데 그거 다 무서워서 소리 지르는 거랍니다.
자기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으면 그렇게 만져주는 걸 좋아해요.
늙어버린 자기를 두고 어리고 귀여운 강아지를 데려올까 봐 불안해서 더더더 귀여워해 줘야 만족해요.
그래도 맛있는 거만 꺼내면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냄새 맡다가 세상 착한 강아지가 되어서 3초 만에 먹어 치워요.
웃긴 건 지도 남자라고 여자만 좋아한답니다.
너무너무 반가우면 가끔 실수도 해요.
필터링 없이 배고프면 배고프고, 사랑받고 싶음 얼굴 들이밀고, 급하면 풀에 가서 싸는 솔직한 감정 표현들. 접촉이 있어야만 표현으로 간주하여 안심하는 친구들.
반갑고 좋으면 개는 오줌을 싸지만 인간은 팬티를 입는다.
누구든 자기가 느끼고 원하는 걸 전부 표현해 버리면 파리의 지하철 냄새가 진동할지도 모른다.
자주 갈아입는 것도 좋지 않지만 과도한 맞닿음을 정제해 주는 사회적 페르소나도 어느 정도는 요구된다.
사귀기 전 연인들의 촉진제는 밀당인 것처럼 아슬한 숨김과 의심 없는 투명함은 호기심과 온기도 같이 잃는다.
그럼 어쩌라고? 평생 한 빤스만 입냐?
가끔 속옷도 갈아입어줘야지
어떤 속옷은 날 너무 꽉 조여서 갈아입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지구에 발생하는 수억 개의 죽음을 일일이 기억하며 눈물 흘릴 수 없는 것처럼 과도한 서사의 축적은 생각할 시간을 앗아간다.
살면서 부모님과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살아본 것도, 기숙사지만 자취를 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내 소유물과 보장된 나의 공간이 나에게 주는 힘. 현대에는 줄어들고 있다지만 사물과 장소가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몸소 실감했다.
수만 가지 조건을 따져 온전히 내 선택으로 이뤄진 사물들은 구태여 나의 쉬는 시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신중한 선택으로 집결한 은은한 이 공간은 서로를 이미 잘 알기에 말을 걸지 않는다. 오래된 친구 사이의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물들은 끊임없이 조잘댄다. 감시하고 조언한다. 폭룡적인 알고리즘으로 도움이 되려 애쓴다.
그렇지만 이 노력은 나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하기에 존중으로 볼 수 없다. 방해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까지 하게 만든다.
우리가 사물을 쓰는 게 아니라, 사물이 우리를 사용한다. 마음대로 조몰락 거리는 것들 아래 나의 영혼은 파편화되고 불안정해진다.
그런 가족이 있다.
붙어있으면 소중함을 쉽게 잊고 떨어져 있으면 애틋함이 더욱 커지는 가족. 서로의 방을 너무도 궁금해해서 기어코 방구석의 먼지 한 톨까지 알아내다 상처 입는 가족. 사랑하는 마음이 크지만 미숙해서 멀리 떨어져야만 입에서 사랑이 떨어지는 가족.
이런 가족에게는 서로의 비밀을 암묵적으로 신뢰하며 기다려주는 사랑, 상대를 상대로써 완전하게 응원해 주는 용기를 연습해야 한다.
빈 수레나 넘치는 수레는 요란함으로 자극을 빈약하게 만들지만 알맞은 양의 수레는 상호 자극의 톱니가 맞물린다.
언제까지고 엄마가 사준 시장 빤스만 입을 순 없잖아. 내돈내산으로 캘빈 클라인도 입고 그래야지.
아니면 내부 사정이 넘 복잡하면 그냥 속옷 속으로 몸을 감춰버리기도 해. 소라게 마냥.
비겁한 선택이지만 어쩌겠어. 단단한 소라 주는 아늑한 고독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그 중간을 잘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연락을 하다 끊겨버리니까, 속옷 안에 갇혀버리니까. 그 기분이 밖으로 순환하지 못하고 동굴을 만들어 버려서 닥쳐오는 불운에 굴복한 적도 있었어. 기어이 약의 도움을 받았지.
근데 결국 연락 한 통이 날 살게 했어. 숨 쉬게 했어.
희망은 손에 쥐는 게 아니야. 오랜 시간 뭉개지고 절망하며 형성된 감각의 심지를 한데 뭉쳐서 몸속 깊이 심는 거지.
그 희망의 심지가 안 맞는 속옷을 벗어던지게 도와준 거야.
내 욕구를 일일이 설계당하는 것보다 예정된 불행에 내 몸을 맡겨 어라라 휩쓸리며 그것이 불행이었는지 행운이었는지 조각해 나가는 것이 짧은 인생에 더 재미나고 유익하지 않을까. 단단한 심지로부터 은은하게 퍼진 강인함으로 더 이상 휩쓸리지 않을 때까지.
나는 알아주는 불운가야. 내가 가는 가게는 늘 문을 닫고 태풍을 소지품 마냥 들고 다녀. 비행기 타러 갔더니 하루가 지연돼서 공항에서 쫓겨난 적도 있고 3일 지연돼서 국제 미아가 된 적도 있어. 택시가 하나도 안 다녀서 지들이 지연시켜 놓고 도로 한복판에 30킬로 짐을 끌고 한 시간 걸어간 적도 있지. 야바위 비슷한 거에 한 달 월급 반을 털린 적도 있어. 하여간 보통 놈은 아니야.
그래도 나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아. 그 불운들로 내 남은 여행을 망쳐버리지도 않아. 틀어져버린 상황 덕에 경험한 새로운 것들이 내겐 더 소중했거든.
인간은 현존재라서 항상 이미 특정한 세계에 던져져 있대.
굿을 해도, 방구석에만 있어도 돌풍이 치고 실패를 일삼는 우리의 운명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거지.
세상에 부유하는 모든 단어들과 경험을 중력처럼 빨아들여 생각의 틀을 만들어 낸다는데, 군계와 일학 그 사이 어디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거대한 중력을 지녔기 때문 아닐까.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빨아들이느라 몇 가지 불운들이 낑겨들어오곤 하는 거야. 기어이 낑겨들어온 불운을 감수하고 넓은 틀을 선택하는 용감함은 '계'도 '학'도 아닌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그러니까 양방향을 모두 아는 우리는 한 가지 뚜렷한 길을 찾지 못해도, 남들보다 오랜 시간을 요구받아도. 결국 이기고 있다.
'사람'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강한 중력을 가진 K야, 더 넓고 근사한 세계를 보여줘서 고마워. 뉴욕에서 더 맘껏 세상을 빨아들이고 오렴.
한여름. 니스에서
나의 불안을 함께 이겨내줘서 고마워
어찌나 저찌나 속옷을 갈아입든 말든, 기계한테 모든 걸 맡기면 외롭고 타인한테 모든 걸 맡겨도 안 외로운 것 같지만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없어 외롭다.
기술이란 본질적으로 우리가 느낀 것들을 배열하는 방식인데 결국 우리의 과거 기억들이 원천이 된다. 때문에 한 사람이 자기의 삶에서 스스로 그 어떤 것도 되짚어 추억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누구의 도움이 있어도 기억을 토대로 미래를 꿈꿀 수도 없을뿐더러 현재를 지각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니까 내 일은 내가 맡는 거야. '나'라는 심지를 가운데 두고 자유롭게 헤엄치는 거야. 수면 위와 아래를 넘나들면서.
그래야 거대한 불운에도 외롭지 않게 카페오레를 홀짝이는 날이 오고야 말지.
혁오, Sunset rollercoaser - Young Man
We have to fight
Only trying to survive
Dead friends are behind you and me
Hands with the fire
Jump to the sea
Only go higher you and me
We haven't fight
Just trying to survive
Anyone alive? You and me
Hands with the fire
Jump to the sea
Go down or higher? Ask you and me
Everyday is yesterday
We don't look back
Go forward with no regrets
We, the young, forever mercy (woo woo woo)
Everyday is yesterday
We don't look back
Meaning's always meaningless
We, the young, forever mercy (woo woo woo)
슬픔은 늘 떼로 온다
기쁨은 늘 스쳐 간다
슬픔은 늘 떼로 온다
기쁨은 없다
Everyday is yesterday
We don't look back
Go forward with no regrets
We, the young, forever mercy
Everyday is yesterday
And we don't look back
Meaning's always meaningless
We, the young, forever mer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