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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온 편지

늦여름 : Do you really know?

by 딸기 상남자







늦여름. 여행지에서 온 편지




: Do you really know?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아는 사람은 타인의 지식에 난 커다란 구멍들을 잘 참아낸다.








* 편지 수신인들은 기껏 써서 전달한 편지들을 공개적인 자리에 올려버린 못난 발신인을 용서해 주십시옹


@ 나에게 온 편지_답글




살면서 처음으로 편지를 받았다. 오직 '유진'이라는 사람을 위해 쓴 편지를 받았다.


한 글 한 단어 마다 영상처럼 그 고유성이 떠오르던 글. 얼마나 한자 한자를 눌러 담았으면, 한 장에 5개월이 느껴지던 글. 이 글은 너무도 고유해서 감히 인용도, 훔치지도 못하겠다.



결국에는 나를 너무 잘 알아서. 한편으로는 나를 다 알지 못해서. 너만이 쓸 수 있는 것.



나에게 없는 것. 실재성. 공감. 부럽다 네가. 이렇게 눈부신 글을 쓸 줄 아는 너가 부럽다. 한 자도 자랑하지 않아도, 한 개의 게시물도 올리지 않아도 척척 너의 매력을 뽐내 보이는 너가 부럽다. 사랑스러움이 넘쳐흐르는 데도 일톨 자랑않고 전파까지 하는 너가 부러워 미치겠다. 늘 겸손하던 너.


매 순간 도둑질해야 했던 나와 달리 당당히 돈을 내고 기부까지 하는 너가 그립다. 필요하다.



프랑스 리옹의 한 카페에서 쓴 편지







- 리옹 뮤지엄 일지




<The Power of Will>


리옹 뮤지엄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 강렬하고도 단순한 모습으로 구석에 놓여 있던 양면의 조각상.




<The Power of Will> 앞과 뒤



앞은 한 쪽으로 부는 바람에 머리, 얼굴 너나할 것 없이 바람이 부는 쪽으로 밀려난다. 포장재에 갇힌 것 마냥 그 입체성을 잃은 듯하다. 하나의 포장된 상품같아. 허나. 그 손가락의 마디 골격은, 머리카락의 가닥성은 존재한다. 억누르려는 힘에 금방이라도 굴복당할 것처럼 괴롭게.



한편 뒤는 질긴 포장재를 뚫고 그 굵은 마디 손가락을 겨우 펴들었을 때의 모습이다. 여기서 얼굴은 입체성을 되찾는다. 얼굴이 제일 먼저다. 눈 코 입. 시각 후각 미각. 어찌나 힘을 손가락 끝에 모았는지 다른 한 손은 몸을 가릴 필요도 떠올리지 못한 채 물렁한 모습으로 늘어져 있다.



'의지의 발현'



내 눈코입이 눌린지도 모르지만, 포장재가 있었는 지도 모르지만. 알을 깨고 힘줄이 있는 손을 번쩍 내보인 자의 이목구비는 꽤나 선명하고 아름답다. 바람에 날려도 내 얼굴은, 의지는 밀려나지 않는다.




이탈리아 해안도시 친퀘테레에서 온 편지_에스프레소를 마시며




@ 이탈리아 해안도시 '친퀘테레'에서 온 편지



나는 지금 한바탕 바다 수영을 마치고 나와 커피를 마시고 있어.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바다들을 봤지만, 오늘 베르나짜 해변의 바다에 물고기가 가장 많았던 것 같아. 늘 물 속에 얼굴을 담그고 푸른 세계를 보고 있으면 너가 제일 먼저 떠올라. 너가 지금 가장 사랑하고 갈망하는 세계는 이런거겠지 하며. 자유로운 팔다리, 아름답게 유영하는 생물들, 차단된 외부의 소음, 고요한 물소리, 이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유대.


어쩌면 너가 끙끙 앓고 있는 현재 상황과 가장 반대되는 풍경이기 때문 아닐까. 그래도 너만의 건강한 탈출구를 찾고 해소를 넘어 진짜 바다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 기뻐. 왠지 바다가 너에게 드넓은 가능성을 보여준 듯 싶어 고마운 존재로 다가오네. 지구에 바다가 땅덩이 보다 훨씬 더 큰거 알지. 그곳들을 모두 정복해보겠다는 시야로 앞으로 나아가면, 지금 너가 하는 고민들, 걱정들, 생각들이 작지만 끝없는 세계로 나아갈, 바다가 될 물방울이라는 걸 알게 될거야. 거길 향해 헤엄하자.




2024.07.05




결국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건 '자신의 의지'.


이것은 자유보다도 더 좋은 권력을 주기에 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자유로울 수 있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게 된다.



정말 아름답고 자유로웠던 친퀘테레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이다. 우리 앞에 놓인 커피 한 잔과 연필 한 자루는 사용가치가 다르기에 어느 것이 더 귀중한 지 알 수 없음에도 가격으로 쉬이 그 경중을 가늠한다. 모든 가치를 수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비교'가능한 대상이 된다. 인간도 이를 피하진 못한다. 태어나자마자 주어진 열세 자리의 숫자 아래 우리는 대상으로서 감시받는다. 계산 당한다. 간단한 조작으로 정리되는 코드들은 전능함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다. 한 명의 인간보다 몇 개의 숫자는 손가락의 타이핑 몇 번이면 삶을 통째로 바꿀 수 있으니. 일률화 되어가는 자본주의의 코드 속에서 숫자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부지런하게 고유한 개별성을 탐색해야 한다.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찾아 보존함으로 저항해야 한다. 때문에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자신의 의지'를 잃어서는 안된다.




무슨 생각해



너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실제로 봐 봤니? 박물관 한 쪽의 유리박스에 틀어박혀 셀 수 없는 시간을 생각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 드는 생각.




얼굴보고 쓴 노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더 무언갈 골몰히 생각 중이다.'


사뭇 심각한 얼굴을 구성하는 그의 생각 근육들을 보고 있노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렇게 까지 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러다 또 드는 생각.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은 생각 바이러스를 내뿜는 듯) 이런 것들을 물리적으로, 수치화하여 설명할 수 있을까.


머잖아 AI와 우리가 구분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사실은 희망을 드리운다. 아직 세상에는 계산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들이 꽤 존재한다. '굳이'의 영역. 없다고 해서, 무시하고 살아간다 해서 삶을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나'로 태어나 '나'로 마감하는 것. 반면 굳이 이 영역에 온몸 바쳐 피곤하게 부딪히는 이들은 삶의 가치를 자유자재로 확장한다. 한계 내려진 인생의 테두리를 제거해버린 이에게 한계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로 태어나 '최대한의 나'로 마감한다. 마감일지도 미지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문학은 거짓 투성이다. 평생 읽지 않아도 의식주 해결에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책의 거짓말은 불확실한 미지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게 한다. 현실과 주인공 사이의 경계를 자유로이 오가며 교묘하고도 은밀하게 우리를 속여 넘긴다. 되려 그 가상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욕망은 진실되게 드러난다.



내용과는 무관한 마요르카 사진 털


여행도 마찬가지. 관광만 해도 생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볼 것 없는 남모를 도시를 가도 장소의 향취, 동행과 나눈 대화, 음식들, 같이 풀었던 스도쿠, 반복해서 들은 음악, 실없는 웃음들. 최고의 '여행'지가 되기엔 충분하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미쳐 보지 못했던 상투성에서 삶을 해방시켜 그 찬란함을 보게 한다. 장소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바뀌어 버린 낯선 장소가 겉치레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발가벗긴다.




랜드마크가 그득한 선망의 관광지를 가도 이름 하나 기억할 줄 모르던 너. 사소한 불운과 가꿈에 추월당해 눈 앞의 눈부신 바다를 사진의 배경으로만 보던 너. 인생의 한 장면이 될 수 있었던 공기와 바람을 말똥 냄새로 흘려보낸 수많은 순간들.




요시고

유사에 입각한 재현은 뻔한 시각을 재확인하여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을 조각상으로 보게 할 뿐이다. 동어반복. 고철덩어리.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표정이 무엇을 말해 주는지. 그것이 근심인지, 행복인지, 무념무상인지는 중요치 않다. 물리적으로 이것들을 대하면 몇 kg의 물체. 빚어내는데 어떠한 도구와 기술이 들어간. 누구의 몇년도 작.(作까지도 미칠 수 있을까?) 지구 반대편의 아름다운 섬에 와도, 유서 깊은 도시 내 천재의 건축물을 봐도 물리적인 사진의 배경이 된다면. 자랑의 작은 부분만이 된다면. 그것은 의미없는 동(일장소)반복.


비가시적인 것들을 가시화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게, 잔재하게 방치한다. 무한한 가능성들을 묵살한다. 그 유명 관광지는 인생 여행지 대신 피드에 태그할 도구가 된다.



건들지 않으면 또 그대로 지장없이 비가시로 살 수 있는 '굳이'의 영역.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혹시 이런 나의 과한 생각들이 당신을 참을 수 없게 하는가?


당신은 진지한 플라톤 주의자 ~ 아마두 더 이상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



아니면 요런 다양한 잠재성의 상상이 즐거운가?


당신은 니체주의자 ~ 아마두 그 무엇도 모른다고 생각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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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really know?






지중해 한가운데에서 온 편지




@ 지중해 한 가운데에서 온 편지



나는 지금 마요르카에서 바르셀로나로 넘어가는 거대한 선박 안이야.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핸드폰도 안 터지는 여정이 5시간이나 남았어. 나도 곧 이 긴 여정의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데, 여러 상황의 폭풍우를 머릿 속으로 정리하던 중 드는 생각들을 써볼까 해. 우리 전에 갔던 사치 갤러리에서 현대 예술의 불친절함에 불만을 토로했었지. 나도 너에게 납득이 갈만한, 내가 사랑하게 된 이 세계를 공유해주고 싶었지만 그땐 아직 단어가 없어 잘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예쁜 나무를 나무로 보지 않고 기괴한 로봇의 몸부림으로 표현하는 건. 나무를 그저 '나무'로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함인 것 같아. 동어반복을 지양하고 한 나무가 뿜어낼 수 있는 무한한 잠재성을 포착하는 것. 모든 것을 수치화, 공산화하는 자본주의에서 개별성을 찾기 위해 발악하는 비폭력 시위. 그런 것들이 아닐까 내 나름 생각해 보았어. 그러다 보니 (다른 길을, 비상식의 길을 가다 보니) 기괴해 보일 수밖에. 그러니 J 너는 이미 현대 예술을 잘 즐기고 있던 거야. 다름에 충격 받아주기.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기. 이제 너가 나에게 늘 보여주는 '무한한 잠재성을 탐색하려는 끈기와 이를 사랑스럽게 봐주는 인정의 눈빛'만 더해지면 너는 예술가야. 사실상 예술은 너처럼 따뜻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거대한 공간이야. 난 언제나 네가 나에게 베풀던 예술을 기억해. 보고싶다 J야. 만나서 얘기 더 나누자.




2024.07.28






공산화되지 않을테야




과거의 예술이 유한한 대상의 미를 재현하려 했다면, 현대 예술은 무한한 대상의 숭고를 현시하려 한다.

이 세상에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증언하는 셈이다. 오늘날의 예술은 '미'가 아니라 '숭고'를 추구한다.




카푸치노와 레몬스콘




@ 프랑스 리옹의 한 카페에서 온 편지



나는 지금 리옹의 한 카페에서 카푸치노와 레몬 스콘을 먹고 있어. 아주 맛나다. 너 없이 여행한지도 벌써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은데 가면 갈수록 너가 써준 편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겠어. (중략) 오늘 아침 S가 쓴 연서 겸 일기를 읽었는데, 참 절절하고 공감가서 훔치고픈 글이더라. 이번 달 블로그가 미웠던 이유는, 5월을 제외한 모든 글들이 미운 이유는 그것 같아. 내 진심보다 그럴듯한 이론을 가져오기 급급해서 그런 글들은 잘 읽히지가 않지. 어제 리옹 뮤지엄에 갔는데 수많은 종교작품들이 한 방에 때려박혀 있는 걸 보곤, 이 작품은 별다른 물자가 없는 시골 동네에 유일한 교회 속 벽면을 도배한 그런. 의지할 곳, 사람,책, 나라 그 무엇도 없는 이들에게 비추던 빛과 같은 숭고한 작품이었을 텐데. 그들의 터전과 공기, 소문, 빛이 어우러져 발광하던 것들을 뚝 떼어다가 리옹의 한 구석에 놓고 제목만 띡 테마 별로 묶는 게 감흥을 줄리가 없지. 라는 생각을 했어. 너는 형상화할 수 없는 공중의 것들을 너의 장소성과 듬뿍 버무려 내놓는 진짜 맛있는 레몬스콘. 이 맛은 맛있음을 넘어선다. 많이 보고싶다. 한국 가기는 싫은데 만날 이들이 많으니까.




2024.07.20



상상해봐 그 차이를



상상해봐. 나는 17세기 어느 시골 마을의 평범한 과일 장수야. 근근이 하루하루 사는데 글도 모르고 여성이라 제대로 된 교육도 못받았어. 허허벌판의 땅에 살며 유일하게 본 그림이란 저 대문짝만한 그림.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로 들이치는 수만개의 빛. 그리고 장엄한 오르간 소리. 맞이한 작품 속 목소리가 '타락하면 반드시 신께서 벌을 내릴 것이다.' 라고 전하면 그들은 뼈저리게 피부로 이 명령을 흡수한다. 그림이 살아 움직여 나에게 번개를 내리 꽂을까 두렵기까지 한다. 이 그림 한 점 한 벽면이 그들에게는 바이블이고 교리였던 것이다. 절대적 도덕기제로 작동한다.


글보다는 그림이, 미디어보다는 주변의 소음. 소문이 더 큰 파문을 일으킨다.



윤슬 예쁘다 헤헤




예술은 정말 정해진 것이 없는 무한의 공간이라고 깨닫았어. 넘 감정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자기의 마음 상태에 따라 보이는 것 같아. 예전엔(마음의 동요가 클 땐) 흰 배경만 봐도 내 심정같아 이 지랄했는데 이제는(행복해서 실존적 문제에서 멀어지니깐) 삼색의 별 이런걸 봐도 느껴지는 게 없어. 걍 회검회. 글쿠나. 북북 찢겨져 나간 것 같은 그림이 친퀘테레에서 본 윤슬로 보여. 모로코 모래언덕으로 보여. 그때 예뻤는데 헤헤. 이러고 있음. 예전같았으면 무형의 블랙홀이 북북 찢겨져 나갔다 뭐 이랬겠지.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베이컨 작품을 봐도 미치광이로 밖에 안보여. (물론 여전히 좋더라).






항복하지 않으면 고깃덩이야. 정육점에 걸려있는 고기와 나의 차이가 뭐야. 날지 않고 항복하는 새와 고깃덩이의 차이는. 죽음의 빛을 피했다는 거지. 혈액순환이 안돼. 피가 뭉쳐있어 보라색으로 서서히 죽음으로 물들어. 보랏빛은 죽음이야. 일단 고깃덩이는 인간이고 새는 아니야.




투우하는 황소와 투우사 중 누가 동물일까. 일단 혈액순환이 잘 되어보이는 건 황소야. 날 수 없어도 열심히 날개짓하고 끝이 없어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들은 피가 돌아. <반도>의 개(인간) 싸움 장면 같아.



야비해.


인간은 야비해.


가만히 있는 인간은 야비해.



유한한 것들을 재현하며 머무는 이들은 베이컨의 경고를 듣지 못한다. 잠수정의 떨어지는 산소 함량을 알려주는 발작 토끼처럼 현대의 베이컨은 부정적 문명을 고도로 집중시킨 촉각을 통해 알리려 애쓴다. 예민한 베이컨씨가 히스테리를 부려서 미리 알려주는 거지. 정신 차리라고. 그래서 필요한거야. 구체적인 숫자로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요, 현대의 예술들은 그래서 이 기울어져 가는 사회에 심지를 세우려 애쓰는 거랍니다.







그림 한 점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사람이 백퍼센트 순수한 마음으로 이타심을 발휘할 수 없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물론 예수님은 신이지만. 왜 그만큼의 이타심을 표출해내셨을까 생각하면 사람들의 온기에 매료되었던 것 아닐까 하는 위험한 생각.



예수님도 하나님의 자식인데 부모님 곁에서 꾸준한 돌봄을 받지 못하고 내려가게 되어 많이 외로우셨겠지.



모든 그림엔 누군가와 함께 계셔. 홀로 있는 관념을 보지 못한 것 같아. 언제나 사람들에게, 제자들에게, 마리아나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지. 어쩌면 완벽한 신들의 군집에서 멀어져 모자라니까 더 으쌰으쌰 살아가는 인간들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온정적 눈빛, 애타게 울부짖어 주는 갈망의 목소리가 필요하셨던 걸지도.


그것들은 중독적이거든.





사랑 충만 스위스



사랑이 부족한 관계는 늘 헷갈리고 꾸밈이 많다. 가끔은 이 스토리의 뻔한 결말이 무엇인지, 빌런이 누구인지, 그걸 또 당하고 있는 바보같은 주인공은 누구인지 투명히 다 보이지만. 달콤한 꿈에 자꾸만 내일을 바라게 된다. 엔딩이 예정되어 있는 이 꿈이 깨어버릴까 무서워 주인공은 어린애처럼 굴다 그 꿈마저 놓쳐버린다. 같은 마음이 아닌 것을 알기에 자꾸만 더 눈물로써 그 마음을 확인하려 애쓴다. 한편으로는 말을 고르려 망설인 적 없는 너같은 애한테 내 마음을 다 주기엔 내 언어들이 너무 특별해 화를 내고 싶다. 망설임이 아름다운 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최적의, 최상위의 표현을 고르다 침묵을 번복하고 결국에는 내뱉어지는 정제된 흔한 말. 아름다움을 진실되게 아는 사람은 스스로 좌절되기를 택한다. 사랑은 진정한 공유를 위한 두 망각 사이의 결합이자, 애써 힘겹게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둘의 교합이다. 우리만의 언어에 욕심이 없다는 슬픔. 공통된 활자에 담기지 못한 서로의 사랑은 그 무게가 무거워 못난 궤도로 불규칙하게 부유한다. 그의 꾸며진 말들은 특정인을 향한 것이 아니다. 대상이 바뀌어도 무방한 비어버린 형용사. 누구로도 대체될 수 있는.


다 벗겨져 있는 너의 말들은 더이상 숨긴게 없어 궁금하지가 않다. 안섹시해 너. 바지 좀 입어.




나, 너가 담은



참 나쁘지. 정의 내리길 회피하고픈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을 선택한다. 발악해봤자 내가 더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가 얼마나 비참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스스로 일깨워야 한다는 듯. 자신만으로도 충만해 있는 능력 있는 남자가 나를 여자로서 인정해 주었을 때, 이 사랑은 남들과는 다를 거라는 잘못된 성취감을 내 몸에 휘감아 버린다. 사실 주인공이 아닌 보조출연자인데도. 그러나 질타는 내 팔에 낀 부속품을 더 강하게 꿰어버릴 뿐. 이런 나를 사랑하는, 이렇게나 멋진 너를, 사랑하는, 나를 벗기는, 너. 나는 더이상 홀로써는 완전할 수가 없다. 이전의 내가 기억나질 않는다. 나도 이제 사랑을 알 것 같아.




'나'를 '나'로 종료하게 옭아맨다. 나라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게, 다 알고 있다고 생각되게 방치해 버린다.





백종원



부지런한 1층 정육점 직원들의 소리를 알람 삼아 일어나고, 어제 먹고 남은 저녁으로 아침을 때우며 저녁거리를 고민하는 것. 나는 그를 마중나가고 함께 손을 맞잡고 버스를 탄다. 직장에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오다 보면 벌써 도착한 집. 간단하게 보는 장. 서로 좋아하는 메뉴를 읊다보면 어느새 가득 채워진 카트. 다 못먹을걸 알면서도 추가해 보는 와인. 너는 마늘을 까는 보조셰프, 나는 국을 끓이는 메인 셰프. 매번 부탁하는 손잡이 없는 냄비를 옮기는 일. 사실 나도 할 줄 알아. 알아서 척척 세팅하는 수저와 앞접시, 그리고 간단한 조명. 유튜브.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레스토랑. 메인셰프는 손님의 후한 리뷰에 미소를 숨길 수 없다. 그러다 보면 금세 알딸딸.



나나나 전부 너가 담아낸 나



그래. 내가 원하는 건 이런거야.


다 벗어버린 너의 몸이 아니라, 포근한 빨래를 같이 개고 까치집의 아침 얼굴을 비웃으며 오목 내기를 하다 투닥거리다가도, 금세 오늘의 데이트를 고민하는 순간들. 어차피 수영하고 밥먹는게 전부일 텐데도. 아저씨같이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너를 부끄러워 하면서도, 예쁜 너의 얼굴을 몰래 찍으려다 들켜버려 민망했던 그런 순간들. 내일의 메뉴가 기대되는 나날들.


아직 만나지 못한 내일의 너가 궁금한 미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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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고싶었다는 한마디.





우리는 또 만난다. 그는 내게 먼 나라로 와달라 했다. 그 음성을 들은 나는 즉시 흔들린다. 스카이스캐너를 열었다 닫았다, 하지만 이내 창을 닫아버리고 내일의 나를 가꾸기로 한다. 오기가 생겼다. 너도 별 수 없이 나를 찾아오(사랑하)게 되겠지. 아니, 난 나를 사랑하게 될거야.






<Vice-Versa 2> 와 라멘


<인사이드 아웃2>를 보다가 사지가 뒤틀리는 줄 알았어. 불안이가 토네이도 속에서 멈춰버린 채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나도 그 폭풍우에 빨려들어 가버린 것 같아서. 성과주체로써 개인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한다. '넌 할 수 있어'라는 강제적 구호 아래 맹목적 자유의 폭력을 휘두른다. 주체는 억압을 자양분으로 착각하여 피 흘리고 있는 나를 보지 못한다. 뒤틀린 불안의 뿌리처럼 종국에는 제어할 수 없는 채찍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자아에서 멀어지는 '심리적 파산' 상태에 이른다.



"난 부족한 사람이야" -------- "나는 좋은 사람이야"



잘하고픈 마음에 엄하게 선별(검열)한 결과 백옥같이 하얀 "나는 좋은 사람이야"의 뿌리가 탄생한다. 너무 엄했던 탓일까. 쿨병에 감옥에 집어던져 버린 유치한 단순 감정들. 기쁨, 분노, 슬픔, 까칠, 소심. 우리는 종종 불안을 원동력 삼아 불확실한 미래에 가닿으려 발악한다. 절친도 저버리고, 안하던 도둑질도 하고, 잠도 줄이며 본래의 나는 우선순위에서 멀어진다. 노동 착취로 모인 수억 개의 시나리오들 중 주인공이 행복한 시나리오는 존재하기 어렵다. 아픈 A, 아픈 B, 아픈 C ...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실체보다도 다가오지 않은 그 실체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공백의 시간이다. 과정 속에 수감된 감정들은 사치스럽게 잊혀진다. 궁지에 몰린 생각은 나로 하여금 무한한 갈증을 느끼게 한다. 그 어떤 보상이 없으니. 착취의 씨앗에서 나온 열매는 곧고 건강할 수 없다. 아름답지가 않아. 완결지을 능력이 실종된 상태에서 나는 한 사건조차 결론 맺어지지 못하고 무한 가동된다. 보상없는 양날의 잣대 속에 처절히 마모되어 간다.




그럼 나는, 내 스스로는 언제 예뻐해줄래.


나 좀 아껴줘




균형 잡히지 않은 감정은 유니콘 혹은 돌연변이를 낳는다. "나는 완벽히 부족한 사람이야"/"나는 완벽히 좋은 사람이야". 완벽한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완벽하다는 말이야 말로 배움의 마침표를 찍는 가장 오만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게워내지 않고 못난 나, 잘난 나, 조금 구린 나, 그 모든 나를 섭취할 때만이 단단하고 진실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불안을 묻어놔도,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쁨을 던져놔도 결국은 병든다. 묻든, 던지든 사실 다 내 안에 있는 건데 무시한다고 사라지나. 편식이 빚은 토네이도는 자기 방어를 위한 회피일 뿐이다. 맛없는 브로콜리도 초장 찍어먹으면 맛있지하고 먹어줘야 풍부하고도 건강한 나로 형체없는 미래에 대응할 수 있어. 세상이 넘 불안정하니까 나라도 심지가 단단해야 해.






냉정과 열정 사이 사랑은 몰까


사랑이란 결국에 '나'를 다시 배우는 일. 누구를 좋아하게 되는 경험은 나의 고유한 본성이 자리한 곳에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그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를 되찾는다. 자아의 죽음. 나르시시즘적 경계의 해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너에게 전복되었을 때 완전한 상대의 현현이 대가로써 지불된다. 속으로만 순환하던 나만의 시야에서 벗어나 타자 혹은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조명할 수 있도록 빛 비춰준다. 때문에 오직 친구, 연인(사랑해본 자)만이 사유할 수 있다. 거짓된 사랑은 이러한 초월적 충실성이 결여된 사랑이다. 한쪽은 타자를 위해 제 발로 늪에 들어가지만, 한쪽은 속박을 묵인한 채 자아를 긍정하기 바쁘다. '둘의 무대'가 아닌 '한 명만을 조명하는 무대'가 된다. 너 안에서 깨어지고 부서진 줄 알았는데, 이제 너에게 새롭게 창조될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그게 그냥 나였다는 허망함. 꽁꽁 숨겨져 있던 껍질들이 발가벗겨진 것 뿐이라는 공포. 너는 벗겨진 적도 없었을까 지레 짐작만 해보는 불안. 보다 쉽게 내보인 진심이 아깝고 부끄러워 나의 선택이 정답이었음을 최면하며 서로를 괴롭힌다. 보상없이 바스러진다.


일말의 감정도 남지 않은 이에겐 실망조차 하지 않는다. 혼돈과 불안 사이를 비이성적으로 오가는 이유는 이 자를 어떻게든 사랑해 보려는 마음의 반증이다. 악착같이 나의 오해로 넘기고픈 중복의 기회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결국 다른 사람의 생을 빌려 조금씩 수정하는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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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에게 보냈던 편지




나는 엔딩이 예정되어 있는 이 꿈이 깨어버릴까 무서워 꿈을 놓치고 있어. 자꾸만 내일이 있길 바라게 만드는 너 옆에서. 한편으로는 감히 내일을 함께 하자고 할 수 없게 하는 너의 다짐들이 날 작아지게 해. 움츠러들게 해. 우린 그냥 한여름 밤의 꿈으로 남아야 하는걸까. 그게 더 아름다울까라는 생각도 하게 돼.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너가 밉다가도 실없는 농담 한 번에 무슨 고민을 했었는 지도 잊어버려. 참 나쁘다 너. 너의 진심이 궁금해. 나랑 같은 마음이었음 하는 조급함에 말보다 눈물이 마중나가. 너는 퇴근하면 치킨을 사오는 참 따뜻한 사람인데. 내가 별 보고 싶다 그러면 기어이 먼저 나가자 하는 사람인데. 우리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자. 눈 앞에 닥친 작은 상처에 내가 너에게 받은 예쁜 감정들까지 무시하진 말아줘.


오늘도 수영하고 밥먹고 사랑하고 평범한 하루가 되겠지. 다시는 없을 하루가 되겠지. 그래도 난 오늘의 너를. 나를 즐길래. 아름다운 기념품으로 이 순간을 남길래. 그 신념을 망치지 않을래.


많이 보고싶을거야. 건강하게, 조금은 덜 행복하게 잘 지내.




2024. Wed.







아름다운 파노라마 기차



슈피츠에서 출발하는 근사한 통창 유리의 스위스 열차 안이었다. 꿈에 그리던 열차에 탔다는 황홀감과 그 자리를 독점했다는 뿌듯함도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스위스 할머니와 나머지 여정을 동행하게 되었다. 낯을 가리는 탓에 뜻밖의 상황이 달갑지 않았지만 이내 할머니의 담담한 이야기에 우리는 매료되고 말았다. 스위스 자연의 포용과 평화를 미소에 그대로 담고 계셨던 할머니는 초콜릿 공장에서 은퇴한 할아버지와 함께 스위스 전역을 여행 중이셨다. 그 어떤 조언과 판단없이 오직 자신이 경험한 광활한 세상을 배경 삼아 전달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너가 늙게 되면, 너는 '아름다운 기념품'을 갖게 될거야. 그건 바로 '기억들'이야. 너가 하고 싶은게 있다면, 그냥 해. 그리고 생각해.
더 넓게 생각하고 세상과 마주할수록,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될거야."



그녀는 한 톨 자랑없이 더 많이 탐구할수록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럴수록 내가 본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될 것임을 흡수시켜 주었다. 삶에 배어들어 있는 스위스의 풍경이 그녀와 어우러져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순간이었다. 그곳에 초대된 나는 행운아 아닐까.




말과 사진으로는 전부 표현 못해







반면 비슷한 날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던 중, 옆자리에서 줄곧 다 마신 음료와 함께 유튜브를 시청하던 아저씨는 어느 나라에서 왔냐며 묻더니 한국이라는 말에 반색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는 늘 그렇듯 k 드라마와 k-pop 얘기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몇십년 전 방문한 한국에 대한 감상이 전부였다. 너희들은 왜 그렇게 뛰어다니니. 네?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 아 그거는요.. (실은 저번 학기 내내 이에 대한 페이퍼를 썼기 때문에 답변에 자신이 있었다.)


Enjoy your life !!



네? 그는 내 답변을 끊고 저 한 문장을 나에게 던져버렸다. 너네 자살률 1위지. 얼마 전에 죽은 그 어린 밴드 누구더라. 우리는 바쁘게 머리를 굴린다. 최근에 자살한 연예인들이 머릿 속에 지나간다. 혹시 종.. 말하려는 순간 다시 한번, Think Positive !! 여유롭게, 또 긍정적으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기러기 생활 중이지만, 모든 돈을 잃었지만, 한때는 의사였고 지금은 그 경험으로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대인배야. 그래서 내 딸이 말이야 지금 ...



우리 바쁘다구요 !!


이게 뭐람. 친절한 아시아인 둘은 더워서 땀이 줄줄 나도 곧 있을 미팅 전 쉬는 시간을 빼앗기면서 그의 훈계를 30분 가량 들어줘야 했다.


결국 심심하던 기러기 라이프에 존재증명이 고팠던 거지. 선량한 아시아인은 서양인 중년 남성의 살아있음을 위해 잠시 봉사한다. 쇼츠에 등장하는 Enjoy your life 같은 멋진 멘트를 날리는 참 어른이고 싶었던 거지. 현지인과 소통할 생각일랑 않고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 바빴던 사람.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얄팍한 단편을 현지인에게 자랑하고픈 알량함이란. 심심했던 거지. 왜 한국인들이 에스컬레이터에서까지 뛰며 쓰리잡을 뛰는데. 인생을 즐길 줄 몰라서? La vie est belle.(인생은 아름다워) 이런 멋진 문장을 몰라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북한인지 남한인지 정도 인식되려면 너희들이 몇 곱절은 더 움직여야 하니까. 위에서 시작하는 너희들은 모르겠지. 달리 있는 출발선을 보지 못하니. 30분의 유희로 소비된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해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꼬질이 여행자들 모두 화이팅


우리도 여유롭게 여행하고파. 우아하게 작은 캐리어 들고 한 곳에 오래오래 머물며 풍경을 음미하고파. 근데 어케해. 넓은 세상을 위해 지구 반대편을 날아오는 용감함을, 그 용감함에는 30kg 이상의 돌덩이가 수반되는데도, 돌바닥 천지를 낭만으로 칭찬해주는 유함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정반대의 시차를 견뎌내며 한정된 시간을 할애해야 하니까. 그 시간에는 급여도 안나온다고. 언제 이 귀중한 시간이 돌아올지 모르니 왔을 때 뽕 뽑아야지. 이렇게 까지 왔는데 인종차별하면은 진짜루 나쁜거야.




그 어느 때보다 다음의 문장이 크게 느껴진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아는 사람은 타인의 지식에 난 커다란 구멍들을 잘 참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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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really know?







몰라 몰라



몰라야 해.

모른다는 것.

내가 모르는 걸 안다는 것.

모르는 말로 인해 더 알 수 있는 것.

안다고 생각하면 더 알 수 없고 배울 수 없기에 알아가겠다는 결심.

수치로, 물리적으로 구석 한 톨의 먼지까지 기어코 설명하겠다는 지성보다, 미지의 공백을 은밀히 신뢰하며 궁금해 하는 호기심.



그 의지의 발현. 사랑.




세상(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들)은 물리적으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세상(의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들)은 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박준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7개월의 긴 여정에서 배운 것들 fin.




and The begi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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