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 불균형과 균형
다시 봄. 그럼에도, 결국에는 사랑
: 불균형과 균형
Happy Women's Day !
*한국, 홍콩, 일상, 사람, 학업, 책, 영화 경계 없이 차곡차곡 사랑으로 모아 온 조각들입니다
일명 사랑 오마카세.. 두둑이 준비해 왔으니 길어도 끝까지 잡숴봐
12월의 어느 날의 기록
그냥 '늘 사유해야 한다. 굳이의 영역.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으나, 있으면 네 삶이 풍요로워지니까 책 읽고 사유해라.'라고 막연히 던졌던 그동안의 무책임한 주장.
마음 한켠에는 늘 '그래서 방구석 일반인들을 어케 설득시킬건데?! 기성세대, 적어도 네 부모님은?'이라는 의문이 찝찝하게 남았지. 자신 없었어. 총을 들고 있는 상대와 달리 나는 그냥 칼 모양을 한 지푸라기를 쥐고 있는 심정. 입만 살아가지고.
평범하고 알파메일 같은 남자친구를 만나며 가장 크게 깨달은 사실은. 집회에 나온 2030 젊은 여성들이 백날 책 읽고, 토론하고, 독립영화 소비하고, 서명을 해도. 이들이 독립과 인디, '비주류'로 남을 수밖에 없는 건.
결국 그들(주류)이 건재한다는 거야. 우물 밖 개구리들이 연대해도 우물이 <7번 방의 선물>을 보겠다고 한다면, 결국 팔리는 건 그거야. TV를 가장 많이 보는 기성세대가 있으니 트로트가, 탁재훈 김구라가 도박을 하든 남을 깎아내리는 농담만 하든 국민 MC로 남아 있는 거고 한구석에서 아무리 예술 광고를 만들어도 주 소비층은 이를 보던 게 아니라고 꼴 보기 싫어한다는 거지. 아무리 발악해도 소수인 거야. 내가 그 안에만 있으니 당최 이 세상이 자명한 사실을 두고 왜 안 변하나 알 수가 없는 거지.
그런데 일이 터진 거야. 결국, 그 일이 터지고야 말았어. 썩어 곪아버린 세상의 진실이 수면 위로 기어코 올라오고야 말았지. 한편으로는 반가웠던 것이 이것이 결국은 인문학의 부재로부터 왔음을, 그 중요성을 입증해 준 것 같아 반가웠지. 전체주의, 사유의 부재, 인간성의 제거가 초래하는 재앙이 결국에는 어디까지 치닫는지. 당장에 하루를 살아내기 벅찬 서민들에게 인문학의 중요성을 왈가왈부하긴 죄스럽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고 굴러가게 하는 것도, 중요한 결정권의 힘도 처한 환경에 상관없이 최종적으로 당신이란 것을 상황이 말해주고 있어.
깨어 있지 않은 사고를 잠자도록 방치하면 사회가 이를 얼마나 악용하고 휘두르는지를 직접 우리 두 눈으로 목도했잖아. 이게 뭐가 잘못인지 알고 바르게 고쳐 쓰려면 또 잠자면 안 되잖아. 그제 와서 배우고 일어나려면 늦어. 늘 내게 어떤 부당함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지하려면, 거기서 벗어나려면. 개선하고 당당히 옳은 편에 서려면. 내가 사유해야 해. 남의 의견을 덕지덕지 기워 얹는 게 아니라.
결국 이것(사유)의 필요성은 절대적이야.
현대의 양극화된 모습은 과거의 지옥 같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전체주의와 홀로코스트는 누가 봐도 논리적이지 못한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생각보다 현대에 만연해 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는 인간의 탄생성과 사멸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영구화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수단만을 취할 뿐이다. 인간의 기계화. 실험실 쥐 1로 영영 소비된다. 목적이 없으면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부유한다. 전체주의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끝나지 않는 억겁의 생산 과정을 절대화함으로써 인간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꿈의 출발점을 짓밟는다.
때문에 우리는 전체주의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인간의 조건이 '노동'으로 단일하게 굳어지지 않도록, 여러 활동 양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죽음이 있음을 인식한 뒤부터 삶이 가치 있어지듯이, 인간은 '죽음'이라는 공통의 공포를 평등하게 나누어 갖고 있기에 이 공포를 공유하며 서로에 대한 애정 또한 갖게 된다. 결속력 있는 공동체주의로써 현대 전체주의 조짐에 대항할 '공통의 공포'는 바로 '사유하지 않음'이다. 이제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를 사유하고 움직여야만 인간 존재로써 가치 있는 삶의 영위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게 평화롭게 살 수는 없는 걸까?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 이 단순한 논리가 그렇게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가?
-없어. -어려워.
사실 할 수는 있는데 어렵지. 복잡하고 까다로워. 많이 외로울 거야.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쉬운 길을 택한다. 나'만' 행복한 법. 일단 나부터 살기. 내가 가진 것이라도 뺏기지 않으면 그만이기.
개인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처했을 때, 더군다나 확실한 내 편이 없다고 느꼈을 때, 소극적 인간은 자신감을 잃고 숨어 스스로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 적극적 인간은 소외되었다는 공포감을 감추기 위해 분노라는 손쉬운 표출법을 택한다.
기득권층은 이러한 심리 프로세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사유하지 않도록 방기하고 종용함으로써 강자의 편은 아몰라 정신으로 그동안 누려온 특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억지 논리를 끌어와 약자를 마구 공격한다. 상대를 악마화함으로써 혐오감을 부추기고 종국에는 분노라는 감정만 남은 채 상대 존재를 삭제함으로써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낡은 지배 전략이다.
적절한 예시인지는 모르겠지만, 플라톤이 왜 그렇게 정신적 고결함과 플라토닉 러브에 집착하고 욕망과 여성을 비방했을까. 니체는 플라톤이 짱 못생겨서 그렇다고 일침 한다. (아야~) 이루지 못한 육체의 현실을 쓰라리게 감당하느니 차라리 육체를 죽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플라톤은 현실에 대해 상상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삶, 더 나은 삶에 대한 환상을 갖고 삶에 복수하는 사기꾼이다.
매콤하군.. 못생긴 사람은 정신을 치켜세워 주는 세계에 속하고 싶을 것이고 사람은 누구나 나를 짱이게 하는 곳에 속하고 싶은 법이다.
설마 고학력의 정치인들이 진심으로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일본군에게 성을 노동으로써 상납했다고 생각할까. (정말 그렇다면 유감이지만) 그들도 터무니없는 말임을 알고 있다. 그저 성폭력을 남성의 본능으로 치부하고 여성에 대한 성착취를 정당화하면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질서를 유지하려는 문화 전략이다. 넘 구려서 목소리 못 내던 사람들에게도 달콤한 제안이 아니던가. 결국 비밀이 보장된 상자에 들어가 매혹적인 유혹에 익명으로 한 표를 던진 뒤, 사회로 돌아와 그들을 욕함으로써 은밀한 바람을 키운다.
대통령마저 공식 자리에서 혐오 발언을 일삼는 모습을 보고 이게 되네.. 싶은 사람들은 점점 익명으로 남을 비방하는 일을 표현의 자유쯤으로 치부한다. 점점 윤리적 감각은 흐려지고 비이성적 일들이 만연해진다.
대표적으로 여성에게 주어지는 잣대가 있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스포일러 다수 포함되어 있음. 꼭 보고 오삼.
영화 <서브스턴스>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은 시각의 권력관계에 있어서 늘 평등하지 못하고 아래에 위치한다. 마치 판옵티콘처럼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서 보여지는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실제 세계에서 가시화된 시각도 존재하지만 내가 보여지고 있으며, 보여지기 위해 준비해야 함을 끊임없이 내면화하는 비가시화된 시각 아래 여성은 상하적 권력체계에 종속된다. 시각은 성적이면서도 꽤나 폭력적인 감각기관이기에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젊고 탱탱한 하얀색 소녀를 원하는 대중들에게 성적 어필이 되지 못하는 아름답지만 나이가 많은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방송계에서 버려진다. 늙고 배 나온 남사장이 게걸스레 새우를 먹어대며 내뱉는 좀먹는 단어들을 그녀는 저항 없이 수집한다. 늙고 단물이 빠진 여성. 그녀는 눈앞의 새우 대신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아.'를 삼킨다. 쓸모를 잃어버린 그녀는 서브스턴스 실험에 참가하기 위해 쓰레기통에 처박힌 USB를 건져 올린다. 스파클에게서 나온 여전히 본인이지만 젊고 탱탱하고 하얀 '수'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REMEMBER YOU ARE ONE
'스파클'과 '수' 모두 그녀에게서 나온 인물이지만 자꾸만 그녀는 수를 타인처럼 대한다. 관심받아 빛나는 그녀 수를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애원했다가도 증오한다. 수도 마찬가지로 늙고 괴팍한 스파클을 흉물 대하 듯 대하며 그녀에게서 골수만을 빼간다.
치킨을 양손으로 게걸스럽게 뜯으며 손가락을 쪽쪽 빠는 나, 소개팅에 나가 한 젓가락만 먹고 배부르다고 하는 나. 방에서 배를 벅벅 긁으며 릴스만 오억 개 보는 나, 예쁘게 차려입고 철학 논문을 읽는 나. 이 모든 모습은 '나'이다. 하지만 사회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모습은 전부 후자이다. 늘 완벽한 모습의 여성을 보고 싶어 한다.
사실상 여성의 대상화 상대는 남성으로 생각되지만, 가장 엄격한 감시자는 바로 여성 자신이다. 영화 중 가장 애달팠던 장면은 버려진 스파클이 피폐한 상황에서 절대 연락할 일 없었던, 그치만 날 여전히 완벽하다고 칭송해 주던 추남을 떠올리고 연락하는 장면이다. 그를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 증명하려 했지만 자신 스스로의 증명이 선행되지 못하여 추남에게조차 등장하지 못하고 그 기회를 부숴버린다. 거대한 스파클의 찬란했던 전성기 사진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수의 창밖 광고판, 그 두 시선의 칼날에 찢기고 베인다. 저들에 비해....로 시작해 난 왜 이리 피부가 쭈글해. 머리도 푸석해, 주름도 많아. 배는 왜 이리 나왔니, 코는 가슴에 달린 것만도 못해. 질서정연하지가 못해. 미소도 괴상해. 쌍꺼풀이 없어. 영영 이 텍스트를 나의 단점으로 장식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저 둘 모두 나인데. 분칠과 장신구를 덧칠한 거울 속 내 얼굴이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워 전부 뜯어버린다.
또다시 교체. 더 나은 나로. 그동안 더 별로인 스파클은 차가운 타일 바닥과 가벽 뒤로 내동댕이 쳐진다.
그날 스파클이 얼굴을 문대지 않고 약속을 나갔다면 그녀는 청명해질 수 있었을까. 타인의 말로 정화되었더라도 이는 온전히 지속될 수 있었을까. 경험, 기억, 인지, 상태는 모두 쉴 새 없이 변화하고 개인에 맞춰 가변 한다. 모든 관념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영영 만족할 수 없어. 인정해 주는 이가 나타나도 의심할 거야. 혹은 너무 의존할 거야. 충분히 아름다웠던 스파클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수의 광고판에게 눈길을 받은 뒤 어려 보이기 위해 볼 터치를 추가했고 목주름을 가릴 스카프를 더했다. 그럼에도 금세 또 걸림돌. 가까운 듯 집 너머에 위치한 성전 같은 광고판은 따라잡기에 너무 멀다. 당연하지. 쟤는 우리 음탕한 뇌가 만들어낸 허상이니까. 자신에게 들이미는 비현실적 잣대에 여성들은 영원히 충분하다 느낄 수 없다.
관념 속 완벽한 여자의 이미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송혜교도 대창 10인분씩 먹는다. 켄달 제너도 야식으로 괴로워하겠지.
이미지의 이미지의 이미지의 이미지... 자기 고유의 덫에 걸려 한없이 이어지는 이미지 재생 속에 갇혀서는 안 된다. 이미지가 현실과 혼동될 때, 그리고 이미지가 현실에 몰두하여 현실을 재활용할 때, 더 이상 무엇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우리를 침수시키는 시각적 흐름 속에서 나오려면 이것이 허상임을 인지하여야 한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발견'한 사물을 재현하고, 명명하며, 개념화하면서 그것을 존재함과 동시에 본질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계급투쟁은 마르크스가 명명한 순간부터 존재한다. 이 편과 저 편도 편을 나누는 순간부터 생성되고 미의 기준 또한 설정한 순간부터 탄생한다. 재현과 개념이 그 대상을 포박하는 지점부터 본질은 필히 기울기 시작하고 에너지는 상실된다. 끝에는 하나의 진실(진실과 무관하게)이 되거나 이데올로기로서 강제되고 만다.
그니까.... 이거 다 뻥이라고!! 다 가짜야. 저는 이 게임을 해! 봤어요오!!!! 얼음!!!!!!!!
영화 <바비> 대사 中
"우린 항상 비범해야 하는데, 언제나 잘 못하고 있지. 마르되 너무 마르면 안 되고, 건강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말라야 하지. 돈은 필요한데 돈 얘긴 안돼, 속물 같거든. 결단력 있지만 성격도 좋고, 앞장은 서되 남들 생각도 포용해야 해. 엄마라 행복해야 하지만 자식 얘기만 하면 안 돼. 커리어 우먼이어야 하면서 동시에 타인도 늘 돌보는 배려심이 요구되지. 남자들 행실도 책임지래, 미친 거지. 근데 지적하면 불평한다고 욕이나 먹어. 외모 관리는 필수지만 그렇다고 너무 예뻐서 남자를 부추기거나 여자의 적이 되면 안 돼. 여성과 자매애를 유지해야 되거든. 그리고 항상 감사하되 불평등한 사회란 걸 잊어선 안돼. 그니까 그걸 인지하는 동시에 감사해야지. 늙어서도 안되고, 무례도 잘난 척도 금지, 이기심도 좌절도 안되고, 실패도 두려움도 돌발행동도 금지야. 너무 어렵고 모순 투성이지만 어떤 누구도 포상도 감사 인사도 없어. 그리고 결국 내 방법은 다 틀렸고, 전부 내 잘못이래. 나를 포함한 모든 여자가 다른 사람 마음에 들려고 자길 옥되는 것도 지긋지긋해."
이 얼마나 모순적이고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가. 그치만 현실인걸.
애초에 달성될 수 없는 이데아를 비추고 있으니 내가 맘에 들 이유가 하등 없다. 영화는 여자들이 마음속 저편에 묻어두는 서글픈 진실 '나는 내가 싫어요.'를 인정해 가는 과정도 담아낸다. 셀럽들에게 아름다움의 비결을 물으면 Love yourself. 긍정적으로 사고하기 ... 개뿔
여성들은 스스로를 쉬이 혐오한다. 겉으로 대놓고 말 못 할 뿐. 뒤에서 치열하게 다이어트하고 주사 맞고 성형하고 찍어 바른다. 필러가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지. 결국 서브스턴스를 중단할 위기 앞에, 수와의 커져가는 간극 아래 그녀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있음을 내뱉는다. 세상이 주입하는 틀에 맞추기 위해 스크린 뒤에서 매 순간 전투태세를 유지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들인 피나는 노력은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자신을 사랑하세요~로 그 진실을 퉁치고 싶은 거야. 열매가 유전자 주사를 맞았든 기형을 택하더라도 지금의 과실을 택했든 뿌리를 갈아끼우든 관심 없지. 몬스트로 딸기만 먹으면 그만이거든. 상처 난 과일은 팔리지 않아. 수많은 잔뿌리들은 땅(등)이 찢겨 피를 철철 흘려도 대충 꼬매고 가린 채 세상에 나가. 이쁜 여자는 웃으면 그만이거든. 너무 찢고 꼬매어 고름이 터져 나와도, 손끝이 썩어가고 무릎이 뒤틀려도 그 모습만 안 보이면 그만인 사회. 곪고 뒤틀려 버린 나의 본질 서브스턴스가 가릴 수 없어 터져 나왔을 때 세상은 나를 괴물이라 기겁한다.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아이의 눈을 가린다. 노출된 젖가슴은 막지 않더니 몬스트로가 뱉어내는 가슴은 흉물로써 가려진다. 그 괴물은 여전히 그녀인데 스파클, 수, 몬스트로 모두 하나인데 그들은 셋이 된다. 우열이 생기고 볼 수 있고 없는 구별이 지어진다. It's me라고 주억거리는 신데렐라 의상 속 몬스트로는 제법 애달프다.
가치와 규범이 혼란스러울 때 줏대 없이 격변하는 기준에 맞춰 같이 휘둘리는 현상은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희망적 사실은 이렇게 절대성을 의심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나는 존재하고 있다. 존재해야 의심도 할 수 있으니까.
데카르트 왈,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생각한다는 유일한 사실로 인해 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환영 같은 세계의 첫 번째 진실이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면 초월적 원리들의 결정에 자신의 가치를 맡기지 않고, 스스로 자신만의 가치를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Uncanny irony] 일명 불쾌한 골짜기..
<The Perfect Woman>
오직 예쁜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다리. 당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춘 형태다. 응시대상으로 여겨졌던 여성의 신체가 오히려 여러 개의 눈으로 관객들을 응시한다. 뭔가 아다리가 안 맞고 상당히 불쾌하다. 이런 대접은 받아본 적이 없다. 쒸익 쒸익 기분 나빠..
비디오는 버자이너의 복수
비디오는 버자이너의 승리
비디오는 박식한 자들의 성벽
비디오는 비어있는 집
비디오는 벗어난 예술
비디오여 영원하라..
9분가량의 영상 동안 평범한 주부로 보이는 그녀는 여느 가정주부와 다름없는 일상들을 행한다. 신문 읽기, 청소하기, 밥하기, 빨래하기, 머리 매만지기, 차 마시기 등등... 주부로서의 여성은 각종 집안일들을 척척해놓지만 동시에 늙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해야 하므로 자기 관리도 놓지 않는다. 실제로 영상 내내 그녀는 외출복을 입고 이웃의 안부를 물으며 이미지 관리 또한 놓치지 않는다. 평이한 일상이지만 모든 일상 뒤에는 거대한 눈이 따라다닌다. 쉬지 않고 재생되는 시퍼런 눈의 시각은 그가 늘 감시당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작품은 일상 내 숨겨진 시선을 가시화함으로써 가정주부의 피로함을 폭로한다.
"'uncanny irony' that asks us to consider how womens are represented in art and pop culture, an issue that is just as relevant today."
아니 에르노가 살아있다면(사진에 현존한다면) 이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놀랍도록 무심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거울 속 본인을 너무도 경멸해 분노가 치민다. 동시에 그 분노에 스스로가 매혹된다.
'가상의 수'로 인해 현실의 거울 내 스파클을 지독하게 응시하며 채찍질한 것처럼 고약한 거울의 굴레를 여성들은 벗어날 수 없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종료될 이 전쟁을 평생 지속시킨다. 내게 가장 가혹한 감시자는 나 자신. 그럼에도 이들은 고발을 멈추지 않는다. 기록하고 기록한다. 다른 여성에겐 내가 겪은 고통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간절히 이 그지같은 감정도 낱낱이 기록한다. 이를 남길 수 있는 절대적 권위자는 여성뿐이므로 이것만큼은 남성에게 주도권을 넘길 수 없음을 기록으로 표명한다.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 그니까 이 기록으로라도 알아줘. 느껴줘.
사유는 예측된 경로를 따라가지 않고 미확정적인 공간으로 나아가기에 자신에 대해 불투명하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에는 일정한 부정성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사유는 자신을 변모시킨다. 스스로 달라진다는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측면이다. 무사유는 언제나 동일한 상태로 머물러 있어 가속화를 가능케 한다. 전체주의로의 진입은 시간문제다. 단 하나의 인식이 기존의 의식 전체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기존의 것들로 포섭할 수 없는 괴상한 예술들도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생경한 대상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의 과정이 우리를 사유의 경로로 이끈다.
분주한 노동자의 모습을 날벌레는 좋아했다.
오늘은 그가 가만히 멈추었다.
날벌레도 공중에서 가만히 멈추어 그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날벌레의 날개는 수없이 움직였다.
날벌레는 문득 자신의 날갯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날벌레는 자신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일치, 불안정, 불균형과 같은 대척점의 사태는 '균형'이다. 이는 예외적 상태여서 도달하거나 성취하기 어려우며 일시적이기도 하다. 때문에 유지하는 데 지난한 준비와 노력, 자원과 전략이 따라야 한다. 균형이 깨진 세계는 이내 붕괴를 향해 폭주할 것이다. 예술은 기록함으로써, 허구를 끊임없이 고발하며 투쟁함으로써 쉴 새 없이 날개를 파닥인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진실로 존재한다.
사랑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 (없음 말고)
늘 사랑은 감성적으로 접근해 봤으니 생물학적으로 함 접근해 보자.
여자의 부정은 범죄처럼, 남자의 부정은 남성성의 표출인 것처럼 취급해왔던 이유는 무엇일까나. 똑같은 쓰레기인데.
남자는 자신이 자식의 생물학적 아버지임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여성은 무조건 자신이 어머니이기에 번식의 관점에서 봤을 때 여성은 절대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만일 번식할 기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싶다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여자의 정절을 확인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여자를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게 하고 대중적 공간에 나서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이런 생물학적 이유를 대놓고 얘기하기엔 넘 동물 같고 부끄러우니까 힘의 관계를 뒤집기 위해 이런 논리를 창조해 낸다.
여성은 본성적으로 약한 존재이기에 남성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니까 정절은 태생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생존에 유리해진다!
얼음!!!!!!
알고 나니 귀엽지. 이것도 다 만들어진 거야.
여자도 만만치 않다. 여성은 자신을 끝가지 돌봐줄 한 명의 든든한 남성을 요하기에 남성의 유일한 사랑이 되길 갈망한다. 여기엔 고통스러운 모순이 있는데, 만일 남자가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으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여자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 이게 뭐람! 그치만 여자들은 다 공감할 거다. 전적으로 여자에게 빠져 버린 남자는 내가 찾는 든든한 받침대가 되어 줄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점점 광적으로 남자가 현재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게임을 하고 있을 때나 친구들을 만나고 있을 때, 사람 많은 엘리베이터에서 전화를 받고 있을 때와 같은 꼭 남자가 진지한 대답을 할 여유가 없는 상황만 골라서 '나 사랑해? 왜 사랑해? 내 어떤 점이 좋아? 왜 대답 안 해? 이런 나도 평생 사랑해 줄 거지? 왜 대답을 못해?' 같은 질문들을 퍼붓는다.
대답을 들으면 전리품이라도 얻은 것처럼 어깨가 올라가지만, 답을 듣지 못하면 침묵으로 대신한다.
일반적인 사랑의 척도가 없어 우리는 열망을 순위 없이 한꺼번에 무작위로 탐한다.
안정을 원하면서 미친 사랑도 원하고, 정절을 원하면서 관능적인 에로티시즘도 원하며, 계약을 원하면서 자유도 원하고, 가족은 원하지만 가족주의는 싫고, 사랑하는 여자를 원하지만 노예는 아니길 바라고, 보호자 같은 남자를 원하지만 독재적인 남자는 원치 않으며, 그 밖에도 무한한 모순들을 원한다. 사랑이 공상적이게 느껴지고 불안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결국 나의 정체성이 희미하면 난간 하나 없는 상대성의 우주에 빠져 애인에게만 의지할 것이고, 이는 상대를 괴롭게 하기에 동시에 타인을 위해 존재하려고 행동할 것이다. 숙고 없이 도주만 하는 사랑은 파괴적이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사실 사랑의 난점은 이기주의에 있다.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상호적으로 보완되는 세계에 반하여 자신의 세계에 동화되길 강요하는 자아는 이기적이다. 나의 이득만을 중시 여기던 주체적인 삶에 있어 사랑의 절차는 극복해야 할 과제이며 그 과정은 나를 깎아내야 하기에 고통스럽다. 자아가 없어도, 자아만 있어도 균형이 맞지 않아 해로운 사랑이다.
나에 대한 사랑이 선행된 건강한 사랑은 타인도 건강히 사랑함으로써 균형 잡힌 미래를 두 사람 모두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본인이 주체의 독립을 쟁취하고 나만의 목표를 세워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다면, 단단한 심지를 중심으로 상대에게 삼켜지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존재를 뚜렷이 하기 위해서, 강건한 모습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때 사랑은 생명의 원천이 된다.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을 사랑이 창출한다. 지속적으로 불균형에 안주하지 않고 나를 재발명할 수 있도록 사유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강한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현대에 먹히는 사랑 어필 법은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로서의 '주체' 개념에 상응하여 상대의 특별한 특징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는 유일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이다. 이전의 언어들로 포획될 수 없는 그는 몹시 매혹적이다.
한국인 사랑에 빠지면 특..
1. 바보같애..
2. 하여튼 희한해..
3. 아무튼 웃기는 애야..
4. 진짜 어이없어..바보!!
개인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바보 같은 모습들을 드러내고, 침해할 수 없는 은밀한 밑바닥을 폭로한다. 사회의 영향력에서 점차 벗어나 둘만의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안심하고 드러낸 불균형함을 서로의 사랑을 통해 평형을 이뤄간다. 이는 사랑만이 독점하고 있는 힘이다.
최근 내 사랑 반 고흐의 전시를 또 보고 왔다. 확실히 다른 작품들과 느껴지는 차이점은 그의 그림은 보고 있으면 서사가 자동 재생된다. 단편적 이미지가 아닌 입체적 삶이 묻어 나온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찰나 옆에서 작품을 감상하던 어머니들의 담소를 엿듣게 되었다.
'사람을 정말 좋아했나 보네. 저 여자를 정말 사랑했나 봐. 계속 나오잖아.'
그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 반 고흐를 보는 새로운 시각이 내 안에서 깨어났다. 그림을 보며 자신의 삶을 토대로 자유로이 짐작해 보는, 과감한 이해의 시도가 어머니스러워서 좋다. 그들만의 온정적인 모성의 시각으로 타인에게 새 관점을 쥐여준다. 자신도 모르게 넌지시. 아마 그 어머니도 사랑을 꽤나 받아보신 듯하다. 이후 꽃 정물화조차 사랑의 서사가 줄줄이 떠오른다.
졸업식. 여즉 잊지 못한 그녀가 등장해 축하한다는 말도 없이 꽃만 두고 갔어. 나는 수만 가지의 가능성과 그녀의 진실한 마음을 가늠하며 매일 집을 나설 때마다 그 꽃을 사랑스레, 동시에 100% 순수하지 못한 의심의 눈초리로 이를 바라봐.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꽃은 영원하지 않으니 속절없이 떨어져. 하지만 그 떨어진 모습마저 그녀답고 아름답게 비참해서 나는 이를 그대로 놔두기로 해. 내 의지대로 되지 않던 그녀처럼.
실제로 반 고흐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특히 자신의 동생 테오에 대한 사랑이 짙었다. 수만은 편지를 쓰며 자신의 안부와 동생의 안부를 살폈고 기쁜 일과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동생과 순간을 공유했다. 그게 최초로 완성했다고 느꼈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의 스케치를 완성했을 때도 쪼르르 테오한테 가서 나 그림 완성했담~>< 편지를 썼다. 꽤나 귀여울지도?
4월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반 고흐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구원과 다름없었다. 삶과 예술을 분리하지 않고 현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스스로의 운명에 맞선 고행의 산물로서 그림을 토해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탕으로 자아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야만 그는 삶을 기어이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그림들 중 자화상이 유독 많은 것도, 인물들에게 서사가 느껴졌던 것도 돈이 없어 스스로를 그린 이유도 있었지만 인물의 특성과 내면 표현에 집착하여 자신을, 그리고 인간을 이해해 보려는 사랑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덕분에 반 고흐의 그림은 환영이 아닌 태양이 작열하는 '진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조명하기 위해 그는 안주하지 않고 사랑을 동기 삼아 예술로 승화해냈다.
얼마 전 다녀온 홍콩의 기록.
Jin♡HK
나 홍콩과 사랑에 빠진 것 같어. 참으로 기묘한 곳이야.
물론 내 주특기가 모국은 죽도록 사랑 못하면서 하루 있던 해외와 사랑에 빠지는 거지만. 그래도.
활기찬 아침 거리. 시장. 빼곡한 건물들과 빨간 택시. 바람에 나부끼는 형형색색의 빨래.
손을 꼭 잡고 걷는 노부부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즐기는 아침.
옛스러운 세월이 묻어나는 차찬탱. 알록달록 음식들.
거대하고 푸르른 공원에서 체조하는 어르신. 물 주는 이.
그냥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이국적이고 아름답다.
필름으로 이 순간을 못 담고 있는 게 한이다.
자연스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쉬어가게 해.
동시에 마구 걷고 싶게 만들어. 쉼과 사랑, 부지런함이 공존하는 곳.
2025.02.11
빅토리아 파크에서 롯데리아 티슈 위에 앉아 씀.
홍콩 사람들의 귀여운 특징. 다들 손잡고 다니는 걸 좋아해. 소녀들, 커플, 부부, 친구, 가족들 모두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두 손을 꼭 맞잡고 다닌다. 괜히 혼자 다니는 내 외로운 손들끼리라도 맞잡고 싶어진다. 순수한 사랑의 형태들은 애정의 향기를 뿜어내어 가만히 있는 사람의 옆구리까지 시리게 만든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 마음. 저들의 행복에 동참하고파.
하지만 손을 잡고 다니는 저들도 다툼이 있었을 테고 사랑과 관계에 절망하는 시기가 있었음은 자명하다. 왜 갑자기 저주냐고? 그게 아니라 이러한 폭풍의 시기를 이겨낸 자들의 견고함은 이전과는 다른 것이어서 더욱 끈끈하고도 평온한 모습을 뽐낸다는 것이다. 사유의 계기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다 발견하듯이 훌륭한 보험 같은 안전한 사랑은 안락과 동시에 제한된 쾌락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희망과 절망을 적절히 안배하는 사랑이 요구된다. 절대적 안정보다는 이방인이 되어보는 경험은 내 안에 다른 이방인을 들이는 일의 이질감을 줄여준다. 그 건강한 선행이 자신도 모르는 모습을 재발명 해주는 것이다.
<미키 17> 본 사람. 안 봤으면 얼렁 뛰어가서 보렴. 난 두 번이나 봄 우하하.
쳇바퀴 안에서 소모, 대체되는 피곤한 이 삶을 살다 보면 현대인들은 나 자신을 우선순위 끝으로 밀어내고 부당한 현실에 순응하며 소진된다. 잘못된 죄책감, 생존 본능에 억눌려 세상의 기대치를 낮추고 지독한 처우에 뇌를 빼고 감사해 하는 법을 익힌다. 그의 적나라한 직업명 익스펜더블(소모품)에 동화되던 미키가 삶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죽음을 거부하며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음을 상기하는 계기가 생긴다.
미키 1,2,3,4, .. 17,18 그 어떤 미키들도 편식 않고 '미키 반스'로 읽어주는 소중한 사랑. 나조차 돌보지 못했던 자신을 더욱 인간답게 사랑할 용기를 심어준다.
외계 원주민은 본래 행성에 살고 있었지만 멍청한 침입자가 '혐오스러운 외계인 크리퍼'라고 칭하면 그때부터 그들은 제거해야 할 벌레가 되고, 버젓한 미키 반스를 싸구려 프린트 육질의 죽으려고 존재하는 '미키 17'이라 칭하면 그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멍청하게 상부가 입력한 언어를 자기화하면 자존감은 어느새 남아있지 않는다. 오직 나샤의 올바른 명명만이 허상의 기준을 걷어낸다.
반복되는 그릇된 욕망으로 인한 인간 실수의 역사 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해온 인류에는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감정이 여전히 작동하기에 희망을 잃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결국 세상을 구하는 건 허영심의 관종 독재자도, 소스 사이코 영부인도, 천재적 과학자도, 최정예 요원도, 간신배 종교인도 아닌 매일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일반 소시민. 그 자리를 책임감 있게 지키면서도 동시에 사유를 소홀히 하지 않고 사회에 대한 의문이 꿈틀대는 그런. 사람과 생명, 되받는 사랑과 배려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그 따스한 마음과 행동하는 결단력, 그럼에도 삶을 사랑하는, 세상을 낙관하는 희망. 이렇게 살다 보면 엉겁결에 영웅 행위가 얻어걸릴 수도.. 그렇지만 이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일상의 진실한 영웅이라는 사실.
그래도 그 영웅은 다음 날 괴로운 알람 소리를 듣고 출근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것이 다른 미키들과 구별되는 미키 17만의 기프트였다.
스파클도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이었다면 파국적 종말을 맞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무례하고 사랑 없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은 결국 사랑. 내가 인간임을 잊지 않기. 더 다정해지기.
(조코 왕귀엽..)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개인과 환경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기반으로 전진하며, 종종 사랑의 범위를 침입하는 것들을 해치워 중용을 되찾아 가는 매력적인 성찰적 삶. 이를 가능케 하는 사랑의 원동력.
균형과 불균형, 그리고 또 균형.
그럼에도 사랑,
결국에는 사랑.
[ ]
(여러분의 사랑을 채워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