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겨울 : 삶을 더치페이한다는 것
아직 겨울 . 비로소 사랑해
: 삶을 더치페이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에 산다는 것.
텅 빈 마음과 차고 넘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겨울.
눕코노미를 기대했던 바와 달리 내 주변은 패키지 여행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핸드크림을 건네던 상냥한 물음에 죄송한데, 전화 중이어서요.라고 흔한 넷상의 MZ처럼 말해버렸다. 그 뒤로 그들은 말을 걸지 않았다. 오해를 풀고 싶었다. 난 그런 사람 아닌데.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나는 지금 유럽에 와 있다. 이곳의 뭐랄까 텅 빈, 의도 없는 호의가 좋다. 사무치게 좋다. 실은 모든 일에 어떤 진심과 의도, 의미 등을 꾸역이 담아내느라 구토 직전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숨이 안 쉬어지던 시절 당최 모르겠던 원인이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나니 의사보다 잘 알겠더이다. 소속된 곳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꼈던 나는 되려 이방인이 되고서야 소속감과 기분 좋은 긴장을 느낀다.
독자를 진찰하는 에세이보다는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강렬한 소설이나 시가 필요한 시점이다.
삶을 더치페이함에 대해, 그에게서 파생되는 동등한 권리에 대해 생각한다.
이곳 사람들은 친절하다. 동시에 매정하다. 음식을 나누는 순간 재료의 할당량을 분배 계산하고, 클럽에선 남녀 모두에게 입장료를 받는다. 정이 없는 걸까 당연한 걸까. 어쩌면 마땅할 이 논리들이 여성들을 같은 출발점에 두도록 한다. 갑자기 웬 여성? 한국의 클럽에서 여성들은 입장료를 내지 않는다. 술값도 마음만 먹으면 공짜로 다 얻어먹을 수 있다. 반면 남성들은 주머니를 두둑이 하고 와야만 그날 밤을 남성적이게 보낼 수 있다. 대신 여성에 대한 일종의 소유권이 주어진다. 함부로 접촉할 권리, 함부로 술을 계산할 권리, 폭력적일 권리 등. 어둠 아래 존중 없는 자세는 입장료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사실 얼마나 요상한(?) 이치였던가. 이에 반해 동등한 값의 시작은 서로를 하여금 존중하게 돕는다. (그렇다고 엄청 젠틀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의사를 묻기 전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룸메 말로는 유사시에 뺨도 때릴 수 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당연한 상호 관계였는지!
우리(한국)는 더치페이를 '정 없음'으로 규정한다. 정내미 없게 뭘 그걸 일일이 계산하니. 내가 낼게. 담엔 네가 내. 취직 기념으로 내가 쏜다. 내가 좀 더 버니까 내가 내는 게 맞지. 점점 쌓여가는 부채감과 암묵적 서열이 그들로 하여금 더 큰 관심으로 응대할 정당성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더치페이는 다르다. 우리는 동등한 양의 살을 떼어냈으니 서로 간의 같은 합의를 요한다. 누구든 지불한 자는.
값을 지불함에 대해 생각한다.
공평하게 앓았던 질병. 꿋꿋이 똑같은 양을(혹은 더 과도하게) 되갚아주던 오지랖.
지불하지 않아 되돌아왔던 無.
지불하지 않았음에도 누적되던 부채감의 빚.
값을 지불하고 즐긴 서로 간의 단편적 유희. 바라지 않는 다음.
지금 내게 필요했던 것은 더치페이였을지도 모른다.
모순적이게도 안정감을 찾기 위해 들른 한인마트. 소주를 고른다. 또 소주만 하염없이 쳐다본다. 친절하신 한국인 사장님은 벌써 소주를 먹냐고 걱정하면서도 소주 1병을 덤으로 챙겨주셨다. 젠장! 인생은 더치페이였단 말이다. 왜 소주 먹지 말라면서 하나 더 챙겨주시는 건데요 ..
한인마트에서 느낀 작지만 한국으로 얽매인 이 정이 위의 생각들을 모두 무력화시켰다. 나는 그만 녹아버리고 만 것이다.
벨기에인인 나의 룸메는 매일 밤 한국의 문화에 대해 묻는다. 주거형태나 여성의 지위, 교육 현장, 집값 등등.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자꾸만 묻는다. 빈약한 영어로 늘 설명하는 한국의 지옥 커뮤니티는 그로 하여금 방문을 망설이게 한다. 대체 그런 나라에 어떻게 숨 쉬며 사니.
나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 It's complicated.'
룸메도 이제 내가 이렇게 대답할 것을 안다. 나의 나라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해 마저 설명이 어려운 애증이 있을 뿐. 단편적인 이야기로 전해 들어서는 이 얽힘에 대해 마지막까지 알 수 없다. 이를 오롯이 살아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경험이기에. 서사 없는 삶은 그저 첨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이 모두 추억이 되지 않듯, 단조로운 연속적 나열에 불가하다. 앎을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니까.
때문에 한편으로 일상을 공동구매하는 슬픔에 대해 떠올린다. 우린, 알지만 느끼지 못한다.
느낌은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열렬히 겪은 사람에게만 남는다. 깨끗한 계산 없이 지저분하게.
카뮈가 말하길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상대에게서 내겐 없는 온전함, 통합된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같은 결함을 보면 거울을 본 듯 불쾌하단다. 더치페이만 추구하다 보면 나 또한 더 이상 환상 속 존재가 아닌 같은 단편적 유희를 바라던 짐승이었음을 상대로부터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반복되는 반응, 상황, 인물, 존재하지 않는 다음. 의미 없는 텅 빈 마음이 내 일부가 되지 못한 채 주위를 맴돈다. 이내 속이 빈 강정은 일주일이면 족히 박살 날 것을 안다. 아픔 없이 얻은 성과는 자족적 지속성이 없기에 한순간에 무너진다.
흔히 우리는 사랑대신 동경할 대상을 찾곤 한다. 나에게는 없는 섬세함, 나에게는 없는 논리적 지성, 나에게는 없는 끈기 .. 대체로 이런 동경의 껍질은 실은 그도 사람이었음이 드러날 때 벗겨진다. 나의 이상향이 나와 다를 바 없는, 혹은 더 못난 자임을 깨달았을 때 느껴지는 배신감은 그를 남들만도 못해 보이게 만든다. 답을 찾길 기대했지만, 복사본만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삶의 지향은 나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늘 이를 보듬어줄, 혹은 헐뜯으며 자각하게 해 줄 타인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도 누군가의 시선(부정형일지라도) 혹은 규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더치페이로는 불가능하다. 분에 넘치는 관심. 질투. 욕망. 사랑. 은 곧 우리의 자양분. 이들이 우리를 지치게 함은 변함없으나, 서로에게 무관심한 수학적 관심은 나르시시즘의 연못에 스스로를 익사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파괴하지만, 동시에 구원한다.
비로소. 럽 마 라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