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프의 개
어느 날 밤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부재중 전화 4통. 누구인지는 모르나 급한 일인가 싶어 문자를 남기고 전화를 걸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렇게 넘어간 그날의 밤. 아이들 등원준비로 분주한 아침, 엄마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 ‘딸 지금 바쁘지?’ 목소리에 힘이 없다. 예감이 좋지 않다.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내 몸이 기억하는 반응이었다. ‘엄마한테 손 올렸어?’ 담담하게 물었고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끝끝내 신랑에게 까발려지는 날이었다. 첫 번째 폭력 이후 다시 폭력이 발생했고 나는 다시 방문 뒤에 숨어버리고 말았다. 불안과 우울이 크게 찾아왔고 신랑의 권유로 나는 그렇게 정신과 치료와 심리상담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의) 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나) 최근 아빠가 엄마에게 휘두른 신체적 폭력이 있었어요.
(의) 아주 힘드셨겠어요. 이런 신체적 폭력이 원래 있었나요?
(나) 네, 직접적 폭행은 지금 사건이 두 번째인데 언어적 폭력은 늘 있으셨어요. 엄마에게도 저희에게도요. 욕과 고함 그리고 뭔가를 부실듯한 행위들 같은 거요. 공포감에 떠시며 우리 집에 3주간 계시다가 자식 집에 있기에 미안하다며 엄마는 쉼터에 들어가 계셨는데 자꾸 딸, 사위, 손자들에게 미안해서 집에 들어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시고 계세요. 그래서 정말 들어가실까 불안해요. 원래 꿈을 안 꾸는데 요즘 악몽을 많이 꿔요.
(의) 혹시 무슨 꿈을 꾸는지 기억나시는 게 있나요?
(나) 첫 번째 꿈은 엄마가 우리 집에 머무르실 때 꿨던 꿈이에요. 아빠가 찾아왔어요. 아빠가 온 걸 우연히 발견하고 제가 엄마를 숨겼어요. 결국 아빠는 엄마를 못 만났지만, 우리 집에 머무르신다는 걸 눈치채고 돌아가시는 꿈이었어요.
두 번째 꿈은 실제로 엄마가 저희에게 분명 이혼을 결심하셨다고 했는데 꿈속에서 엄마에게 새벽에 자꾸 연락이 와요. 엄마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고요. 그럴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어요. 그래서 잠에서 깨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하고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다시 잠들기가 무서웠어요. 악몽이 현실이 될까 봐요.
(의) 뭐가 가장 힘드세요?
(나) 트라우마가 다시 재발된게 너무 힘들고 무서워요.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건 엄마를 책임져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그게 너무 저를 답답하게 만들어요. 살면서 전 한 번도 보호받는다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저도 엄마와 같은 피해자였지만 심지어 자식이었음에도 늘 제가 보호자였어요. 그게 절 힘들게 만들어요.
(의) 그러시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정 씨는 엄마와의 분리가 필요해 보여요. 그 일은 어머니 일이에요. 왜 미정 씨가 해결하려 해요? 엄마가 그 집에 다시 돌아가는 건 어머니의 선택이에요. 어머니와 거리를 두세요.
(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식이니까 해결해야죠. 그런데 모르는 척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그 말도 엄마에게 했어요. 지난날의 삶은 다 엄마를 탓할 수는 없지만 다시 들어가서 생기는 일들에 대한 삶은 엄마의 선택인 거라고요… 무슨 일이 생기든 그건 엄마의 책임이라고요. 그럼에도 속상하고 슬프고 무서워요. 죽어 돌아올까 봐서요. 형부에게 물었대요. 공기계로도 긴급 신고를 할 수 있냐고요. 또다시 폭력이 발생하면 그땐 스스로를 해쳐야지만 그 집을 나올 수 있겠다고 말까지 했대요.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돼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는 이유요.
(의) 그것 또한 어머니의 선택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마음 아파도 신경 쓰지 마세요.
(나) 전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그날이 그렇게 무서웠다면서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한다는 것이요. 그 용기면 재산분할, 공무원연금 분할받고 이혼해서 더 편하게 살 수 있잖아요.
(의) 그렇게까지 어머니는 안 무서웠나 보죠. 혼자 사는 게 더 무서우셨을 수도 있고요. 치료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인지치료 좀 필요해 보이고요. 우울과 불안이 높으니 약도 같이 처방해 드릴게요. 마음 편하게 드시고요. 아시겠죠? 다음에 봬요.
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엄마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외도를 했던 사람, 신체적, 언어적 폭행을 했던 사람이라며 지금도 이 순간도 엄마에게 가스라이팅하고 있다고. 제발 정신을 좀 차리라고 화를 냈었다. 어쩌면 나는 엄마의 이혼으로 그 사람과의 연결을 끊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엄마가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또 엄마의 그 '보여주기식 가족 놀이'에 나까지 같이 놀아나야 했으니까. 엄마가 집에 다시 돌아가는 순간 또다시 내 발에 족쇄가 채워질 거란 사실에 나는 난 엄마가 이혼하기를 바랐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가 결혼이라 믿었다. 결혼만 하면 난 그와의 관계도 끝일 거라 믿었다. 그러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이 순간까지도 '파블로프의 개'였다. 당신이 행한 폭력 사건이 없었다면 난 여전히 당신의 '개'였을 거다. 하지만 당신 덕분에 숨기고만 살았던 나의 추잡스러운 비밀이 수면 위로 올라왔고 그래서 나는 치료를 받고 있다. 난 이 치료를 통해 무기력함과 외로움에서 벗어나 '오롯된 나'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