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반퇴일지 4편 : 퇴사 이틀 차, 현타가 왔다.

퇴사했지만, 퇴사한 게 아닌 것 같은 날

근로의 연속

아무래도 그랬다.

오래 다닌 회사를 퇴사하는 만큼 마무리도 잘하고 싶었고, 필요하다면 일정 기간 도움도 줄 수 있다

생각했다.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가는 것이었기에, 내가 맡아온 일 중 일시적으로 넘기기 어려운

두 가지 업무는 후임자가 올 때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퇴사일까지 두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 있었기에 충분히 잘 정리하고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한 달 정도 남았을 때부터는 여유가 없었다.

야근까지 해가며 마무리를 시도했지만 계획했던 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았고 결국 인수인계용 외장하드는 내 가방에 들어 있었다.



퇴사 다음날

그렇게 퇴사를 했고, 다음 날인 토요일은 마지막 회식의 피로를 달랬다.

그다음 날인 일요일, 그리고 월요일엔 엄마 병원 진료가 있어 본가로 향하던 중 연락이 왔다.

“조금 전 후임자 면접을 봤는데, 일단 채용하기로 했어요”


반가운 소식이긴 했지만 마음이 급해졌다.

6월엔 여행 등 개인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6월 넷째 주쯤 여유 있게 인수인계 파일을 정리해 제출할 계획이었다.


10년 넘는 시간이 담긴 자료들이라 업무 중 급한 대로 이곳저곳에 저장해 둔 파일이 많았고, 볼 때마다

한 번씩언젠가 시간 내서 폴더 정리 한번 해야지’ 했던 일들이 그대로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걸 퇴사 시점에 와서야 정리하려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고, 업무를 하면서는 도저히

마무리를 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아씨 망했네’

조급증이 말려왔다.

나는 성격이 급한 데다 전형적인 파워 J.

후임자가 오기 전까지 해주기로 했던 업무는 바로 업데이트해야 했고, 주말부터는 여행 일정이 시작되니

나에게 남겨진 시간은 4일 남짓.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쓰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컴퓨터를 연결하고 인터넷부터 확인했다.

바로 업데이트 업무를 시작했다.

원래 회사에서 마치고 나왔어야 했는데, 못 하고 퇴근해 주말에 재택근무하는 사람처럼…


각종 백데이터를 확인하고, 추정 수치를 넣는 작업이다 보니 원래도 일정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

장소도 바뀌고 마음은 급하고, 시간은 흘러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 아, 내일 엄마 병원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자야 하는데…’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그러고도 한 시간이 더 지나 새벽 1시 반이 넘자, 불현듯 현타가 왔다.

“아놔 나 퇴사했는데… 아 이거 퇴사하고는 못할 짓이구나…”





퇴사라는 현실

이틀 전, 나는 예비 퇴사자였던 조직 안에 속한 ‘직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퇴사 후 이틀 된 사람’, 말 그대로 퇴사자 일 뿐이다.


조직 안에서의 나는, 필요하면 주말에도 시간을 할애하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도, 명분도 없다.

그게 퇴사다.

나는 진짜 퇴사자가 된 ‘나’라는 현실과 마주했다.


그동안에 나는 ‘나’ 보다 회사를 우선순위에 뒀던 거 같다.

삶에 중심이 ‘회사’라는 공간과 ‘나’로만 구성돼 있었고, 때로는 ‘나’의 시간 속에서도 ‘회사’를

먼저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를 내 삶의 중심에 놓는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어설프고 서툴러도 이제는 나를 위한 시간을 살아갈 차례다.



그리고,

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퇴사 이후의 삶은, 생각보다 현실을 반복해서 깨닫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반복될수록 조금씩 ‘회사 없는 나’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반퇴일기 3편 : 파이어족을 꿈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