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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퇴일기 5편 : 여행

퇴사하니 좋은 점도 있다

퇴사 날짜가 정해지니, 주변에서 여행 이야기를 많이 했다.

“오래 일했으니 쉬면서 여행도 좀 다녀와”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여행은 어디로 갈 거야?” 하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어릴 때 여행은 당연히 친구들과 함께 가는 거였고,

친한 친구들이 결혼을 하자 함께 가는 여행에는 제약이 생겼다.

혼자 여행이 어색하고 자신 없던 시절엔 사전 동행자를 모집해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다.


혼자 여행, 혼자 영화 보기, 혼자 밥 먹기…

그 모든 ‘혼자 하는 일들’이 어색하고 어렵고, 창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혼자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 시작이 다들 비슷한 계기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도 혼자 여행을 시작하게 됐던 거 같다.


그 이후로 혼자 여행은 너무나 당연해졌고, 편해졌다.


하지만 직장인에게 여행이란,

최대한 길게 가되, 연차는 최소한으로 쓰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도 대부분 전 국민이 움직인다는 황금연휴에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비행기와 호텔은 가장 비쌀 때였고, 혼자 가는 여행에서 호텔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자유인.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황금연휴를 피해 여행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래서 비행기는 마일리지로 끊고, 호텔을 알아봤다.


나는 원래 호텔에 돈을 꽤 쓰는 편이었다.

혼자 여행이니 중심가, 안전한 곳, 성수기…

호텔은 늘 나에게 가성비가 가장 떨어지는 항목이었다.


직장인일 때는 ‘버는 돈이 있으니까’ 조금 과한 소비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백수가 되니 단순히 절약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소비를 마주하게 된 것 같다.


“지금 이 가격에서 더 떨어질 거 같지 않은데…”

“아, 이 가격이 적정가격이구나”


호텔을 알아보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엄청 비싸게 주고 다녔구나”


돈을 벌 때는 몰랐다.

아니, 더 좋은 곳으로 예약하느라 바빴는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었으니 좋은 호텔을 가야 한다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수지타산으로 따져보기보다는

여행에 설렘과,

영원할 것 같았던 안정적인 수입에 안주하던 조직 안에서

딱, 한 치 앞만 보고 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백수가 되니 제 값을 주고 여행을 할 수 있네?”

“연휴에 쫓겨 비행기 좌석 없을까 걱정 안 해도 되고, 웃돈 주고 예약 안 해도 되네?”

"퇴사하니 좋은 점도 있네...?"


분명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들일 텐데,

이렇게 새삼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놀랍다니.

그동안 얼마나 한쪽 눈을 가리고 살았던 걸까.


한 치 앞만 보고 살던 때,

알면서도 일부러 질끈 감아버렸던 눈이

이제야 현실을 인지하고, 천천히 떠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당분간은 이런 일들이 몇 번이고 반복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또,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기뻐할 것이고,

그저 '퇴사하니 좋은 점도 있다'며 마냥 행복해할 것이다.


벌써 또 여행이 고파온다.


깨달음이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자제력도 필요한 타이밍이다.


잊지 말자.

'백수'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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