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인정하고 용기 내기
사주를 봤다.
물론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유독 작년에는 네 번이나 봤다.
그건 나도 처음이었고,
돌이켜보니 정말 힘들었나 보다.
한 해에 네 번이나 보다 보니,
과거에 들었던 말들과 겹치는 부분들이 있었고
이젠 더 이상 안 봐도 될 만큼
‘나’라는 사람이 조금씩 정리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지금의 나를 ‘백수’로 이끈,
기억에 남는 말들이 있다.
“지금까지 너무 희생하고 살았는데,
앞으로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세요. 그렇게 될 거예요.
어떤 결정을 해도 결과가 그렇게 나쁘지 않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됩니다.”
“롤 모델이 마더 테레사는 아니죠.
이기적으로 사세요.
해결사 같아요. 죄책감을 버리세요.
미움받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가 엄청 착하고 좋은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나는 대문자 'T'형 인간.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팩폭의 대가다.
그래서 처음 저런 말을 들었을 땐 나조차도 의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들을수록 어느 면에서는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사주도 일종의 '상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친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 하는 이야기들을
제3자에게 더 편하게 털어놓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사주도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용기 낸 것이 바로 '퇴사'였다.
(물론 여전히 '착한 사람' 코스프레 하느라
깔끔하고 매정하게 끊고 나오지 못해 여전히 현타를 맞는 중이긴 하지만…)
나는 당연히 “다들 그런 마음들을 갖고 있지 않나요?”라고 물었는데,
그렇지 않단다.
나는 나에 대한 객관화는 잘하지만,
욕구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툰 사람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내 주제 파악은 잘한다.
하지만 내가 정작 뭘 원하는지는 잘 모른다.
지금도 그렇다.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다.
나는 나에 대한 기준이 엄격하고 강박이 강하단다.
통계적인 삶,
틀을 잘 만들고 그 이상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억눌린 나를 찾아야 하고,
기존에 나를 벗어나야 한단다.
‘나’ 로서 사는 게 중요한 사람, 내가 나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철저히 이기적으로 살라고 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는데, 몰랐던 이야기 같았다.
예전엔 사주를 보면
“그래서, 저 뭘 해야 하죠??”
이 질문만 던졌던 것 같다.
남을 통해 해결책을 얻고 싶어 했던 거다.
하지만 이번엔
“그럼 이제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겠네요”라고 말했다.
항상 생각만 하고, 계획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던 일들.
해보고는 싶었지만
잘 못할까 봐, 창피할까 봐 배우러 가지 못했던 것들.
이제는 하나씩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삶, 불완전한 나도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억눌렸던 감정을 꺼내보라고 했다.
배움을 통해 잘할 수 있는 것,
에너지를 오래 쏟을 수 있는 일,
그게 뭔지를 찾으라고 했다.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사주? 그거 그냥 심심풀이로 보는 거 아니야?"
"그걸 믿는다고?”
그럴 수 있다.
누군가는 종교적인 이유로 혹은 각자의 기준에서 사주를 멀리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사주는
그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 상담이었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삶이 펼쳐졌고
어떤 이유에서든 '나'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계획없이 펼쳐져 있는 나에 시간들,
그리고 퇴사 후 한달.
이제 내가 해야할 일은 '루틴 만들기'였고, 그 첫 단계로 운동을 등록했다.
하나에 루틴을 만들었다.
주저하던 나에게 '퇴사'라는 도전과
생각만 하고 미뤄왔던 '운동'이라는 첫 걸음.
이 정도의 동기 부여라면,
'사주' 한번 쯤 괜찮지 않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