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 가장 깊이 있는 페미니즘 영화

'바비'와 비교를 통해 본, 가르치지 않고 증명하는 서사의 힘

by 이땃쥐

'판의 미로'는 어떻게 가장 깊이 있는 페미니즘 영화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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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여러 페미니즘 영화가 있지만, 어떤 영화는 교과서처럼 느껴지고 어떤 영화는 깊은 울림을 지닌 서사시가 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는 단연코 후자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이라는 깃발을 흔들지 않으면서도, 그 어떤 영화보다 여성의 주체성이란 무엇인지 아프고도 숭고하게 증명해 낸다.

이 어두운 판타지가 어떻게 가장 빛나는 페미니즘 서사 중 하나로 남았는지, 최근의 다른 영화와 비교를 통해 그 가치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불복종'이라는 이름의 위대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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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의 힘은 여성의 주체성을 '남성과의 대립'이라는 단순한 구도에 가두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영화의 배경인 1944년 스페인파시즘이라는 거대한 남성적 폭력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시대다.

주인공 오필리아를 억압하는 것은 새아버지 ‘비달 대위’ 개인이기 이전에, 그가 상징하는 군국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시대 그 자체다.

이 거대한 억압 앞에서 소녀가 선택한 무기는 바로 '불복종'이다.

오필리아의 여정은 불복종의 연속이다.

그녀는 "현실에 순응하라"는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고, "상상 속에서 살지 말라"는 어른들의 충고를 거부하며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심지어 요정의 경고를 어기고 ‘창백한 남자’의 연회에서 포도알을 먹는 치명적인 실수는, 역설적으로 그녀가 타인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욕망과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주체임을 증명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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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복종의 여정은 영화의 마지막, 갓 태어난 동생의 순결한 피를 바치면 영원한 왕국의 공주가 될 수 있다는 판(Faun)의 제안 앞에서 절정에 달한다.

오필리아는 약속된 권력과 영광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손으로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기를 거부한다.

이는 ‘착한 소녀’의 순종이 아니라, 폭력적인 세계의 룰을 따르지 않겠다는 가장 능동적이고 고귀한 '선택'이다.

그녀는 타인이 정해준 공주가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길을 택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한다.

하녀 메르세데스가 비달 대위에게 칼을 꽂으며 "내 아들은 당신 이름 따위는 모를 거야"라고 선언하는 장면 역시, 폭력적인 남성성의 대를 끊어버리겠다는 또 다른 결의 불복종이다.


가르치려 들 때 메시지는 힘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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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의 이러한 접근법이 얼마나 탁월한지는, 최근 화제가 된 '바비'와 비교했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

'바비'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비판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명쾌하고 직설적이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많은 관객들이 스크린이 자신을 가르치려 든다는 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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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러한 직접적인 메시지가 한국의 현실과 부딪힐 때 그 괴리감은 더욱 커진다.

많은 젊은 세대는 권위주의적 남성 중심 사회의 질서를 만들고 그 최대 수혜자였던 기성세대는 정작 책임의 무대에서 비켜나 있고, 그들이 만든 무한 경쟁 사회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자신들에게 부당한 책임이 전가된다고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바비'가 제시하는 보편적인 '가부장제' 비판은, 그 비판의 칼날이 정작 진짜 권력자가 아닌 엉뚱한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억울함을 느끼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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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판의 미로'의 비달 대위는 바로 그 '책임지지 않는 구시대의 권력'을 정확하게 조준한다.

그는 오만하고 폭력적이며, 자신의 세계 외에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관객은 오필리아와 메르세데스의 저항에 깊이 동화되며, 이는 단순히 영화 속 인물을 응원하는 것을 넘어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는 듯한 강렬한 대리 체험이 된다.

영화는 명확한 적을 설정하고 그에 맞서는 인간의 존엄한 투쟁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저항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증명하는 것의 힘, '판의 미로'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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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판의 미로'가 위대한 페미니즘 영화인 이유는, 여성의 주체성을 구호로 외치거나 교리처럼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 소녀의 삶과 죽음을 통해, 진짜 주체성이란 외부의 억압에 맞서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따르는 위태롭고도 숭고한 선택의 과정임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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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는 우리에게 페미니즘이란 단순히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이분법적 투쟁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폭력과 억압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보편적인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 소녀의 작지만 단호한 "아니요"가 독재자의 군대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판의 미로'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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