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맨 프롬 어스'가 던지는 질문
여기, 거대한 자본이나 현란한 시각효과 없이
오직 대화의 힘만으로 우리의 지성을 송두리째 흔드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맨 프롬 어스(The Man from Earth)>입니다.
10년마다 거처를 옮겨야만 했던 존 올드맨 교수는,
작별 인사를 위해 모인 동료들에게 자신이 14,000년 전부터 살아온
구석기 시대 사람이라는 믿기 힘든 고백을 꺼내놓습니다.
이 한마디는 그 자리에 모인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물론,
스크린 너머 관객의 지성과 상식을 거대한 시험대에 올리며 밀도 높은 지적 탐험의 시작을 알립니다.
존의 이야기는 우리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온 역사를 지극히 인간적인 서사로 재구성합니다.
그는 자신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서양에 전파하려 했던 인물, 즉 '예수'였다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신의 아들이 행한 기적과 부활은,
한 비범한 인간의 지혜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오해와 믿음이 빚어낸 '이야기'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는 종교의 기원이 초자연적 현상이 아닌,
인간의 역사 안에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는 도발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존의 이야기가 단지 지적 유희에만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그 영원한 삶이 품고 있는 지독한 비극성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늙고 병들어 스러져 가는 것을 수없이 목격해야 하는 삶.
반복되는 상실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깊은 관계를 애써 외면하고,
10년마다 모든 것을 남겨둔 채 홀로 떠나야 하는 고독.
그의 초연한 태도는 오랜 세월이 선물한 지혜인 동시에,
영원한 상실이라는 형벌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둘러야만 했던 단단한 갑옷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삶은 영생이 축복이 아닌 저주일 수 있음을,
그리고 유한하기에 더욱 찬란한 우리 삶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영화의 가장 도발적인 지점은,
단순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 '믿음의 구조' 자체를 해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독실한 신자인 에디스 교수는 존의 논리적인 설명에 이성으로 맞서기보다,
그의 말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며 감정적으로 거부합니다.
이는 이성과 증거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견고한 속성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14,000년을 살았다는 증거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존은 "내 존재 자체가 증거"라고 답합니다.
이 논리 구조는 놀라울 만큼 종교의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신의 존재 증거는 성경"이며, "성경이 진실인 이유는 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자체 완결적 논리와 정확히 일치하죠.
결국 영화는 종교적 믿음의 작동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신이 없는 세상'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대체 서사를 완벽하게 구축해냅니다.
그리고 관객에게 넌지시 묻습니다.
한쪽의 이야기는 의심 없이 믿으면서, 다른 쪽의 이야기는 왜 믿지 못하는가?
'맨 프롬 어스'는 우리에게 명쾌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의 근원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는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한 인간의 비범한 경험이
어떻게 신화가 되고, 역사가 되며, 수천 년을 이어온 거대한 믿음의 체계로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주면서 말이죠.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나의 믿음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내가 진실이라 여기는 이 위대한 이야기들은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존 올드맨의 영원한 시간은,
유한한 삶 속에서 우리가 선택하고 믿어가는 수많은 이야기의 가치를 새롭게 돌아보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