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입도한 지 십 년. 한림에 산지도 십 년. 이제 조금씩 마을 구석구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누구나 가고 보는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 이야기를 소소하게 적어 보려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님도 모르는 우리 동네 이야기,... 일곱 번째 이야기다.
지금의 명월진성
"아버지! 아버지 근무하실 때 명월성 못 보셨어요?"
"...."
못 보신 모양이다. 답이 없으시다.
아무리 당신 관할 구역이 한림과 금악이었어도 한림에서 1km 남짓 거리에 있는 명월성을 왜 못 보셨을까!
이제 그 해답을 찾았다. 아버지께서 근무한 1960년대(후반)는 명월성이 없었다. 우리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붉은 물결을 만들고 있을 즈음인 2002년에 제주도는 명월성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아!! 명월성이 복원된 지 20년 정도밖에 안 됐구나!!!
명월진성은 비양도 인근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1510년(중종 5년)에 목성으로 축조되었다가, 1592년(선조 25년)에 석성으로 다시 쌓은 성이다. 조선시대의 제주는 1목 2현의 행정체계였는데, 현재 제주시에 있는 '제주목 관아'가 바로 제주목사가 육지에서 부임되어 오면 머물렀던 곳이다. 2현은 정의현(성읍_제주 동쪽)과 대정현(모슬포_제주서쪽)이다.
조선시대 제주는 위와 같은 행정체계에서 9 진성 25 봉수 38 연대를 설치했다. 9 진성을 보자면, 동쪽에서 서쪽방향으로 돌아가며 화북진성, 조천진성, 별방진성, 수산진성, 서귀진성, 모슬진성, 차귀진성, 명월진성, 애월진성이다. 나는 이 중 명월진성 바로 아랫동네에, 더 정확히 말해 명월진성 남문 바로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현재 마을 이름이 남문동이다.)
탐라순력도의 명월진성
사실 지금 복원된 명월성은 그림 위쪽에 있는 남문과 그 성곽일부만 복원됐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를 육지에서 바라본 방향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그림의 윗부분이 남쪽이다. 오른쪽 아래에 비양도도 보이고, 비양도에서 10시 방향으로 보면 관에서 운영하는 월계과원도 있다. 우리 동네로 연결된 길 이름 중 월계로가 있는데, 그 이름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성 내에 샘이 있는 성은 명월진성이 유일하다.(월계과원에서 바로 10시 방향)
<영주십경도> 해석에는 '주변에 돌로 둑을 쌓아 못처럼 가득 차서 비록 천만의 군사가 길어다 써도 끝이 없다'라고 나온다. <우리 동네답사기 3: 산물>에서 썼던 것처럼 우리 동네는 예부터 물이 풍부했음을 말해준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숙종 18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를 순례하고 그 기록을 남기게 하였는데, 제주 출신 화가 김남길이 그 순례의 기록화를 그렸고, 총 41편으로 이루어진 탐라순력도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가 요즘 한림읍사무소에서 기간제를 하고 있다. 동네 어르신들이 내게 묻는다.
"명월성지에 뭔가 들어선다면서?"
"글쎄요...."
읍사무소에서 일한다고 모든 걸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알고 싶다, 뭐가 들어서게 되는지.
그럼 땅 값 좀 오르려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