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첫 출산 여정,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2014년 10월 중순은 나의 제주 이주민 생활이 시작된 때다. 아직도 기억이 선하다. 이 날 나를 격하게 반겨 주었던 건 몹시 부는 바람이었다. 간단한 이삿짐이었지만 배를 타고 입도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심한 이유로 배가 뜨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비행기 표를 구해 몸만 하늘에 실려 날아왔다. 비행기도 마치 언덕길을 굽이쳐 내려오는 버스 같았다. 바람으로 요동치는 비행기 안에는 남편, 나, 그리고 뱃속의 아가 이렇게 세 식구였다.
나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너무 감사하게도 허니문 베이비를 얻었다. 남편은 제주도에 혼자 사는 늦깎이 총각이었고 나는 수도권에 사는 늦깎이 싱글녀였다.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얻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하마터면 저체중 아이로 분류될 뻔한 2.5kg의 작지만 귀한 아들을 자연분만으로 순산했다 내 나이 44살에.
나는 마흔셋에, 그리고 남편은 마흔여섯에 우리는 결혼했다. 드디어 결혼이란 걸 해 냈다. 사회적 기대감에서 훨씬 늦은 나이에 인생의 로또를 맞은 것이다. 40대에 결혼에 성공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내 경우엔 그랬다. 같은 교회에 10년 넘게 다녔건만, 서로 한 번도 만나본적도 없고 소문조차도 들어 보지 못했던 사이였다. 내가 남편을 소개받았을 당시의 남편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에 내려가 산 지 1년 6개월 정도 됐던 때였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만남을 이어 오다가 우리는 2014년 6월에 결혼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 해 8월에 임신 소식을 듣게 되었고, 생각보다 조금 일찍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나는 남편이 있는 제주로 이주했다 임신 4개월에.
임신을 확인했을 때, 병원에서는 바로 산모수첩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4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아이는 잘 착상이 되고 자라고 있어 4주 후에도 아무 문제없이 산모수첩을 받았다. 임신 초기에 병원에서는 나에게 피검사(기형아 유무 확인)를 권유했으나, 고민하다 우리 부부는 피검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런 후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로 옮긴 산부인과 병원에서도 아이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다. 나도 임심 중 큰일이 없었다. 아이도 잘 자라 주었다. 그런데 임심 후반으로 가니 아이가 잘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엔 의사 선생님이 그냥 '많이 드세요'라고 했다. 그다음 진료가 되어 병원에 갔더니 아이가 거의 안 자라 있는 것이다. 임신 후반에 가면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크는데, 몸무게가 거의 늘지 않은 것이다. 이번엔 의사 선생님이 약간의 언성을 높이셨다. 이렇게 안 자라면 수술해, 아이를 꺼내서 키우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일주일 후에 다시 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날 나는 병원을 나오며 한없이 그리고 하루 종일 울었다. 주위에서 단백질 섭취가 아이를 크게 한다고 해 주어서 일주일 내내 소고기를 먹었다. 일주일 후,…
다행히 수술을 면했다. 휴!! 병원을 나와 남편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고 집에 가는 길에 만개한 벚꽃은 꽃비를 내리고 있었다. 한 고비 자~알 넘긴 축하의 메시지처럼.
3일 후, 양수가 새어 나와 병원에 연락하니 빨리 오라고 했다. 오후 세네 시경 병원에 도착했을 때, 양수는 반 밖에 남지 않았다. 밤이 되자 자궁엔 양수 없이 아이만 있었다. 아직 진통은 없다. 이럴 땐 수술행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께서 아침까지만 지켜보자고 하셨다. 다행히 나는 밤새 10분 간격의 진통이 시작되었고, 무통이라는 의학의 힘을 빌려 18시간의 산고 끝에 2.5kg의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낳았다. 휠체어에 실려 3층 분만실에서 2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온몸에 심한 오한이 느껴졌다.(나중에 알았는데, 이 오한은 무통주사 후유증이라고 했다)
예정일보다 아흐레 일찍 나온 아이로, 나의 친청어머니는 부랴부랴 예매해 놓은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앞당겨 제주에 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남편이 공항에 모시러 간다고 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내가 못 가게 했다. 나는 움직일 수 없고 아기가 젖 달라고 울면 어찌하나 라는 공포감이 먼저 들었다. 평생 시골에서 몸 쓰며 일만 하셨던 분이라 팔순을 내다보는 엄마는 또래보다 훨씬 몸이 부실하시다. 게다가 분명, 손가방 하나만 들고 오지 않으실 터, 막내딸 아기 낳았다고 이것저것 담아오고 사 오셨을 게 분명한데, 그런 엄마를 그냥 택시 타고 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스러워서 눈물이 난다. 이것도 나중에 안 사실인데, 아기가 태어나서 하루 이틀은 안 먹도 된단다. 나는 태어나면 바로 먹여야 하고 또 아기도 먹을 것을 찾는 줄 알았으니,...
그리고 그다음 날은 시어머님께서 오셨다. 며느리가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하니 많이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친정엄마는 나랑 병원에, 시어머님은 남편과 집에 하루를 머물고, 출산 이틀째 퇴원을 했다. 집에 온 날은 내 남편 생일날이었고, 우리 친정오빠 생일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친정엄마, 시어머님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집에 있는 세 여성이 모두 출산을 한 날이었던 것이다(물론 나는 이틀 전이지만 말이다.) 이런 일도 있다면서 서로 웃으며 함께 미역국에 밥 말아먹었다.
삼일 후 시어머님은 다시 육지로 가셨고, 친정어머니는 두 달 후 가셨다.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울고 친정엄마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