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 두근
'누구를 사랑 하냐고요?’
‘글쎄요.’
‘요즘, 가슴 뛸 일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심장이 항상 콩닥거리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인 나이다. 결혼 35년 차 부부 사이란 안타깝게도 무덤덤하니 건조하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구피의 아침 식사를 챙기는 것만 봐도 남편은 구피에게조차 순위에서 밀린다. 부부들이 다정하게 손잡고 산책하는 모습은 내게는 박물관 유물 같은 일이다. ‘그나마 ‘먹고사니즘’을 위해 조금 친한 척하는 것은 다행인 건가?’ 고작, 고구마 순 무침을 먹기 위해 머리 맞대고 껍질 벗기는 정도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쌓인 전우애와 동지애가 있어 그나마 가능한 일이다. 속사정과 달리 그림은 제법 근사할지 모른다. 이런 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 ‘두근두근’을 선물하는 것이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는 라디오를 챙겨 듣는다. 클래식 초보 ‘클린이’지만, 듣는 것은 즐긴다.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방송하는 CBS‘김정원의 아름다운 당신에게’는 그래서 매력적이다. 줄여 ‘아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재 피아니스트라 불린 김정원의 깔끔하고 차분한 진행과 선곡 또한 훌륭하지만, 고전음악에 대한 해박한 해설이 있어 더 좋다. 그의 지성이 라디오를 뚫고 나온다. 꾸준히 듣다 보니 좋아하는 작곡가도 생기고 제목은 모르지만, 귀에 익어가는 음악도 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곡에 나름 취하기도 하고 바리톤 고성현의 ‘시간에 기대어’는 노랫말을 곱씹게 했다. 안드레아 보첼리를 만나는 날에는 그의 목소리만큼 마음이 맑아진다. 특히, 셀린 디옹과 부르는 ‘The Prayer’는 우아한 하모니를 선물한다. ‘이 정도면 클래식 숙맥 수준은 면한 건가?’
퇴직 후 삼식 님으로 입문한 남편이 이른 시간 외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볼륨을 한껏 올린다. ‘아당’과 ‘최강희의 영화음악’까지 이어 들으면 12시가 된다. 강 같은 평화와 휴식이 흐르는 시간이다. 프로그램 특성 때문인지 청취자의 격조 있고 교양 있는 문자나 사연은 맛을 더한다. CBS‘레인보우’ 앱 채팅방에는 클래식 지식이 잔뜩 묻어나는 글들이 넘친다. 나는 ‘아당’의 백미로 화요일 퀴즈 타임을 꼽는다. 일명, ‘와글와글 음악 퀴즈’다. 네 곡이 힌트가 되고 음악을 들으면서 답을 찾는 방식이다. 누구도 정답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외나무다리 힌트’ 단계에서는 답을 거의 떠먹여 준다. ‘이래도 답을 모르시겠어요?’라는 설명이다. ‘와글와글 음악 퀴즈’와 ‘외나무다리 힌트’라는 작명 또한 일품이다. 정원 님은 음악을 들려주기 전, 정답과 관련 있는 말을 몇 마디 흘린다. 남보다 빠르게 답을 찾으려는 욕심에 귀를 쫑긋 세운다. 깜깜이 상태에서 몇 마디 들려주는 말만으로 정답을 유추할 수 있는 시간은 채 1분도 안 된다. 찰나나 다름없다. 상상력을 최대 발휘해야 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브레인스토밍’이 발동하는 순간이다. 운 좋게 음악 듣기 전에 정답을 추리한 날은 뿌듯하고 흥분된다. 과거, 시청자로 ‘MBC 장학 퀴즈’의 답을 맞혔을 때의 쾌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때는 ‘내가 이런 사람이야.’ 스스로 칭찬한다. 제일 빠르게 정답을 보낸 3인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다. 워낙 눈치 빠른 사람이 많은 탓에 한 번도 그 안에 든 적은 없다. 확률이 낮기도 하지만 퀴즈 당첨은 언제나 남 일이다. 서둘러 정답을 맞히려고 애썼을 분들이 ‘나와 같은 부류들이겠지?’라고 생각하면 픽 웃음이 새어 나온다. 모르는 분들에게서 나의 향이 느껴진다. 당첨이 되면 좋겠지만 나의 목표는 짧은 시간 두뇌를 쓰며 느끼는 희열에 있다. 그렇다 보니 화요일마다 찾아오는 기회가 너무 감사하다. 쫄깃쫄깃한 두근거림과 긴장은 소소한 일상 중 으뜸이다. 이런 정성이 통했는지 제작진은 송도 아트센터 사라 장 공연과 부천 필하모니 연주를 감상하라며 초대장을 보내주었다. 애청자로 인정받은 느낌이다. ‘퀴즈는 열심히 참여하지만, 당첨이 안 되니 연민으로 베푼 은혜가 아닐까?’
사라 장의 바이올린 연주는 묘기에 가깝다. 노련하여 여유롭고 정열이 뿜어져 나온다. 객석 환호에 기꺼이 많은 앙코르곡을 들려준 그녀의 겸손 또한 감동이다. 준비한 연주 못지않게 앙코르곡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알파치노의 시각 장애인 연기가 매력적인 ‘여인의 향기’ 탱고 음악과 엘가의 ‘사랑의 인사’와 비발디 사계 중 ‘겨울’ 등이 앙코르곡이다. 귀에 익은 곡이다. ‘아당 덕인가?’ 역시, 아는 곡은 몰입이 쉽다. 꼬마 팬이 전하는 손 편지에 그녀는 환하게 웃는다. 부천 공연장에서는 나처럼 초대받아 오신 분과 나란히 앉았다. 초대받은 기회가 많았음인지 나란히 앉은 우리도 초대받아 왔다는 것을 직감하셨다. “아당에서 초대받았나요? 제작진은 나란히 앉도록 표를 주시더군요.” 먼저 물었다. 우리는 구면인 듯 친근하게 얘기했다. 비록 스친 인연이지만 ‘아당’이 이어준 만남이다. 그분은 김석훈과 강석우가 진행했을 때부터 이 프로그램을 사랑한, 오래된 청취자다. 초대장이 두 장이라서 지인과 동행했다. 남편은 구피에 이어 지인에게도 밀렸다. 나와 달리, 그분은 혼자 오셨다. ‘표 한 장이 주인을 찾지 못하다니!’ 안타까웠다.
누구는 ‘그게 뭐라고 겨우 이런 사소한 일에 가슴 뛴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 덕에 클래식 까막눈 신세를 면해가는 나로서는 아주 고맙다.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다 두근두근 설렘을 배달하는 퀴즈가 있으니. 이 방송이 효자인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거창한 것이 아닌,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은 기대감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아닐까?’
‘그나저나 언제쯤 클래식 고수급 청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