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티

체육대회의 첫 번째 관문

by 정종신

체육대회 시즌이 돌아왔다. 아직 중간고사를 치르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이미 운동장 위에 가 있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체육대회 준비가 시작되면, 반에서 제일 먼저 아이들의 이목을 끄는 건 언제나 반티다. 공지가 떨어지면 교실은 순식간에 술렁이고, 여기저기서 “반티 뭐로 할까?”라는 말이 쏟아진다. 그때부터 아이들 눈빛이 달라진다.


겉으로 보면 단순하다. 반티 사이트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 고르고 주문만 하면 될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체육대회에서 반티를 정하고 주문하는 일은 학급 전체의 기류와 역학관계가 응축되어 드러나는 무대다.


누가 나서느냐에 따라 갈린다

보통은 반장이 맡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반장보다 평소 교실에 큰 관심 없던 아이가 갑자기 나서는 경우가 많다. 특히 ‘노는 아이들’이 그 중심에 서는 경우가 잦다. 평소에는 종이 울리자마자 복도로 나가 자기 무리와 어울리던 아이들이, 이상하게 반티만큼은 적극적으로 주도한다.

왜일까. 체육대회는 학급 단위 행사다. 평소에는 다른 반 친구들이 더 친했을지라도, 이날만큼은 자기 반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게다가 원래 노는 걸 좋아하던 아이들이니, 이 큰 행사를 흥겹게 준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 출력해 오고, 교실 앞 게시판에 붙이고, “이 중에 골라봐” 하며 반 아이들 앞에 내놓는 모습은 단순히 장난이 아니다. 그 속에는 ‘이번엔 나도 반을 위해 뭔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섞여 있을 거다.


하지만 반응은 차갑다

문제는 아이들의 반응이다. 준비해 온 리스트를 본 아이들의 표정은 의외로 냉담하다. “어차피 네가 하고 싶은 거 뽑아온 거잖아.” “난 관심 없어.” “반티는 그냥 체육복 입으면 안 돼?” “왜 우리 반은 다른 반보다 만 원씩 비싸?” 불만이 삐죽삐죽 터져 나온다. 말은 하지 않지만 무심히 고개를 돌려버리는 아이들도 많다.

주도한 아이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왜 아무도 몰라주지?’ 서운함과 억울함이 교차한다. 그래서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경우도 있다. 사실 교사 입장에서 이런 장면을 보는 건 낯설지 않다. 하지만 매번 그 눈물이 새삼스럽게 마음을 건드린다.


최종 결정까지의 험난한 길

그렇다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디자인 후보를 몇 개로 줄이고, 투표를 해야 한다. 스티커를 나눠주어 붙이게 하거나, 손을 들어 표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반 분위기는 삐걱거린다. 모두가 고르게 참여하는 듯 보여도 마음은 저마다 달라져 있다. 결국 반티는 정해지지만, 과정에서 흘린 땀과 눈물은 결코 가볍지 않다.

디자인이 결정되면 일이 끝났을까? 그렇지 않다. 진짜 힘든 건 그다음이다. 사이즈를 한 명 한 명 물어봐야 하고, 제일 중요한 돈을 걷어야 한다. 여기서 늘 문제가 생긴다. “난 하겠다고 한 적 없어.”라며 돈을 내지 않는 아이가 꼭 있다. 회의 시간에 반대하지 않았던 아이인데, 막상 돈을 걷자고 하니 발을 빼는 것이다. 주문 마감일은 다가오고,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결국 해결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결국은 다 해결된다. 체육대회 당일 다른 반은 모두 반티를 입고 있는데, 자기 반만 체육복 차림이라면? 그건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장면이다. ‘그래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마지막에는 발동한다. 그러니 반티 준비가 기적처럼 마무리되는 것이다.


반티 준비는 학급의 축소판

반티 준비 과정을 보며 생각한다. 이건 단순히 옷을 고르고 맞추는 일이 아니다. 지난 몇 달간 아이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지내왔는지를 확인하는 종합 평가 같은 시간이다. 반티를 두고 벌어지는 작은 갈등은 이후 체육대회 준비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선수 선발을 두고 벌어지는 다툼, “내일 아침 연습하자”는 말에 절반이 씹어버리는 상황, 준비 과정에서 쏟아지는 원망과 서운함… 모두 반티에서 예고된다.

체육대회는 하루의 행사이지만, 그 하루를 준비하는 과정은 길고 소란스럽다. 그 소란이 흥미롭다. 아이들의 진짜 얼굴과 진짜 관계가 그 안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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