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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Aug 25. 2020

별 것 없던 여름

[사진과 단상] 경기도 연천

[사진과 단상] 별 것 없던 여름


별 것 없던 어느 여름, 오늘처럼 덥고 습한 날. 졸업을 앞두고 몇 년만에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친구의 연락이 왔다. 내일 월차를 냈는데 어디라도 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둘이 발단이 되어 마침 급한 일 없던 친구들을 불러냈다. 무더위 속에 어디라도 떠나고자 마음을 먹었고, 일단 만난 우리는 어디라도 가자고 했다. 운전을 하며 어딘가로 향하다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연천 망향비빔국수가 우리들의 대화 도중 모습을 보였다. 일단 국수를 먹으면서 생각해보자는 말에 우리는 그냥 연천으로 떠났다. 당일치기 여행이기도 했고 서로 모여 엄청난 것을 행할 필요도 없는 우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혀 망설임없이 연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 연천은 우리 모두가 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는 장소였다. 한 명은 다른 부대에 근무했지만 우연히 한 주를 같은 신교대에서 교육받았고, 또 한 명은 장교였는데 내가 전역한 후 그 부대에 발령받았다. 그 운명으로 우리는 서로가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음을 알았지만, 얼굴을 마주하며 같은 시공간에 서있었던 적은 없었다. 기억의 접점이 시작되는 공간에서부터 우리는, 평행하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의 시공간 속 우리의 기억이 교차하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같은 막사와 같은 연병장, 같은 간부들과 같은 진지를 공유했다. 군부대 앞 비빔국수집, 멀리 떨어진 곳의 사격장을, 우리는 다른 시간에 다른 방식으로 추억하며 공유하고 있었다. 각자의 경험이 하나의 공간에 녹아들어 융합했고, 그 공간은 너의 공간이자 나의 공간이며 우리의 공간이었다. 비에 젖어 행군하는 내 모습, 새벽 2시 혹한기 철야 훈련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내 모습 옆에 땀 흘리며 제초를 하는 너, 다 쉰 목소리로 유격훈련을 지휘하는 네가 서 있었다. 


한탄강 어디쯤에 차를 세워두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우리는 한참을 고요했다. 흐르는 강물 속 우리의 교차하는 시공간 속 추억들도 함께 흘러 아련했다. 덥고 습한 여름날의 공기보다 끈끈한 우리의 추억들로 하루를 꽉꽉 채우고 다시 동네로 돌아갔다. 학창시절 곱창을 좋아했던 우리는, 이제는 어느덧 커서 곱창에 술 한 잔까지 기울이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대화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별 것 없던 여름의 그 어느 날은, 별 것 있던 과거의 어느 날들로 장식되어 아름답게 남아있다.


2년이 흘러 다시 여름, 그때의 덥고 습한 공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하루이다. 더위에 지쳐 아무런 욕구도 로망도 들지 않는 하루가 될 뻔했는데, 우연히 뒤적이다 그 날의 사진을 발견했다. 별 것 없던 여름 어느 날의 추억이 날아들어, 별 것 없는 여름 어느 날까지도 잠시나마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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