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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Sep 20. 2020

걸을 때 보이는 것들

나는 참 걸어다니기를 좋아한다. 한 동안 제대로 걷지를 못하면 무언가 답답하고 우울해진다. 그래서 최근 서울에 갔을 때는 우연히 시간과 장소가 알맞아 잠수교를 건넜다. 그 전에 서울에 갔을 때도 정말 즐기던 취미인 월계동 걷기를 했다. 그래, 생각난 김에 다음 번에는 종로를 걸어야겠다. 나의 서울, 대학로에서 광화문까지 걸으며 소일거리나 해봐야겠다. 이렇게 꼭 일상 속 장소나 도심지가 아니더라도 도통 걷지를 못하면 산에를 간다. 산도 마찬가지로 걸어 올라가야하니, 뭐 걷는다는 맥락에서 같아서 그런가보다.


이제는 어디 여행을 가서 그 동네를 걸어보지 않으면 무언가 충족되지 않은 기분이 든다. 평상시에 살고 있는 동네도 주기적으로 걸어줘야한다. 걷지 않으면 내가 그 공간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피상적으로만 공존하며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고 보일 뿐이지 사실은 별개의 존재로 그냥 놓여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며칠 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밖에 나가서 걸으리라'고 다짐했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비교적 자유롭게 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는데 직장인은 그게 쉽지 않다. 퇴근이 불규칙한 때도 있고, 퇴근을 하더라도 혹은 주말에라도 챙겨야할 일이 뭐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물론 일이 없더라도 몸이 늘어져 창 밖만 바라보다 지나가는 날도 가끔 생긴다. 하지만 그 날들도 지나치게 반복되다 보면 힘들다. 정적인 집 안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걷기의 유혹에 못 이겨 내심 크게 기뻐하며 걸으러 나갔다. 마침 소나기가 한껏 쏟아부은 뒤 햇살이 창창한 그런 가을날이다.


기온과 하늘빛의 변화로 가을이 온 것을 짐작했건만, 정작 나는 가을을 충만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동네 뒷 산을 오르며 느낌 가을 바람은 생각보다 상쾌했고, 자연은 여름을 떠나보내며 풀내음을 한껏 뿜고 있었다. 길가엔 코스모스들이 한껏 흐드러져 가을 내음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어가며 햇빛은 점차 누런 빛을 띄었다. 선명하게 자신을 발산하는 것처럼 보였던 풍광은 어느새 아련하게 저물어가는 풍광으로 바뀌었다. 가을은 또 아련한 계절이 아닌가. 오묘한 색의 조화 속에 차도 사람도 없는 길을 홀로 걸으며 가을을 만끽하며,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가을을 찾았음에 안도할 수 있었다.


역시 걸어다니는 일은 이롭다.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충분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길을 걷지 않았다면,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는 풀내음도, 산들거리는 코스모스도, 아련하게 내린 햇빛도 겪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비로소 걸을 때, 그 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이라든가 희미해졌던 것들 또는 처음 발견하는 것들을 찾게 된다. 혹시 알까. 낯선 골목의 선물 같은 찻집이라도 찾게 될지. 아니면 친구들과 공 차던 운동장, 사랑하던 이와 걷던 북촌 거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아름다움이, 걸을 때 보이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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