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 도착한 후 피로와 긴장의 절정에서 급강하하여 하루를 푹 쉬고 나니 몸이 가벼웠다. 달콤한 온기가 몸을 녹였던 호텔을 떠나 눈과 한기의 땅이 된 강원도 영월로 떠났다. 호텔에서 황금빛 조명으로 혼을 빼놓던 크리스마스 트리의 먼 친척들이 생명력 넘치는 풍채로 눈 덮인 산야에 서있는 곳이었다.
영월로 들어가는 길, 조금 일찍 아침을 먹어서였는지 속이 허전해왔다. 들르려던 곳은 아니었으나 우시장이 번성했었다던 주천에서 한우국밥으로 속을 데우기로 했다. 신혼여행이라는 컨셉에 걸맞지 않아 보이게도 시골 장터 옆의 작은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었다. 그런데 사실 한우국밥의 의미는 작지 않았다. 음식이 주는 힘은 역시 강하다. 음식을 접하며 사람은 자신의 위치와 상황, 감정을 극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전날 호텔 조식에서는 폭풍 같은 결혼 준비가 끝나고 감사한 인연들의 힘으로 평화로운 시간을 선물 받았다는 생각에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하루 지나 영월에서 국밥을 한술 넘기면서는 속에서 살아있음 같은 것이 끓어올랐다. 이틀 정도 평소에 잘 먹지 않던 것들을 먹어서 그랬는지, 평범하지만 일상성이 있는 국밥이 마치 원래 먹었어야만 하는 음식처럼 술술 넘어왔다. 그리고 뜨끈하고 칼칼한 국물과 바깥의 눈 쌓인 풍경이 겹쳤다. 영월의 추위가 확실히 느껴졌다. 국밥 한 그릇은 본격적인 겨울 영월로의 초대장이었다.
눈과 한기 속, 고요하다 못해 약간은 고립된 느낌을 주는 그곳에서 신혼여행답게 온 세상에 둘 뿐이었다. 길에도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았고, 영월에서 처음으로 들른 요선정에서 특히 알 수 있었다. 무릉도원면이라는 재밌는 행정구역명이 나타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하고 작은 마을의 눈 쌓인 공터에 차를 댔다. 임대문의 표지가 붙은 펜션이었던 곳 근처를 지나 잠시 야트막한 산에 오르니 조용한 정자인 요선정을 볼 수 있었다. 그 정자까지 오르고 내려오는 길에서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아내에게도 나에게도 요선정 자체가 주는 경험보다는 아무도 만나지 못한 그 경험이 더 컸던 것 같다. 둘이 떠난 여행지가 정말 둘만의 시공간이었던 점이 특별했다. 슥슥 얼음이 된 눈길을 발로 미끄러져 내려가며 웃고, 사실 별거 없이 눈만 쌓인 산길도 좋아 서로 사진을 남겨주며 걸었다. 해가 약간 넘어가기 시작하려는 오후 4시 무렵, 마침 하늘 빛깔도 낭만적이었다. 요선정은 무릉도원에 있었다.
무릉도원을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청령포였다. 굽이쳤던 물이 고립된 유배지를 만들었고, 마치 단종이 결단코 나갈 수 없다는 강한 비극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인지 얼음이 얼어 꽉 막힌 요새와 같은 인상이었다. 얼핏 보면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다. 눈밭 너머 소나무길과 추운 겨울 다섯시를 넘어갈 무렵의 하늘은 내가 있는 공간을 잊게 만들었다. 이르게 뜬 달과 태양의 마지막 몸짓과 흐르는 구름은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득 슬퍼진다. 유배된 단종은 자신의 저물어가는 모습이 사무쳐 매일의 해질녘을 붉은 눈시울로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소나무 숲 사이에 아내와 둘이 가만히 서서 1분 정도만 있어보자고 했다. 망향탑에 올라서도 가만히 먼 산을 보고 싶었다. 망향탑에 올라선 방향은 서울 방향이었다. 겨울 바람만 부는 고요한 해질녘, 내 감정도 너무 저물어가려 할 때 아내는 나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마침 관리인이 저 멀리서 다른 여행객은 못 봤냐며 우리에게 물어왔다. 어느덧 해는 산을 훌쩍 넘겨 그 몸짓도 희미해져 갔다. 배는 얼음이 잔뜩 얼어있는 물을 건너 다시 우리를 청령포 밖으로 안내했다. 애도가 너무 길어진다 싶어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청령포에서 출발할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고, 숙소는 계곡에 위치해 어두운 산골을 지나고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 앞은 무척이나 어두웠고 인적이 드물어 고요했다. 공교롭게도 숙소 손님마저 둘 뿐이어서 한적하다못해 정적이 감쌌다. 그리고 그날은 목성과 토성이 아주 가까워지는 날이었다. 밤하늘 별빛에 홀려 겨울밤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겨울 영월에서의 어느 하루는 따뜻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