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봉에서 본 것은 희망일까

남아공-나미비아 여행 2일차

by 르겔

볼더스비치를 떠나 케이프 반도의 끝, 희망봉으로 향하면서 점점 날씨가 안 좋아짐을 느꼈다. 독특한 식생의 땅을 지나 그렇게도 바랐던 희망봉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이란 단어와 도무지 어울리는 기분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흐린 날씨에 걱정도 됐고 무더운 여름에 쌀쌀한 곳으로 와서 그런지 몸도 으슬으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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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 같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먼저 간 곳은 케이프 포인트였다. 희망곶 언덕 위에 서있는 등대에서 희망봉을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한다. 넓게 펼쳐진 남대서양을 기대하면서 이곳까지 왔지만 큰 기대감이 없었다. 구름 속을 걷고 있어서 매우 습하고 사실상 비를 맞는 것 같았다. 오히려 희망봉 이전의 이름이었던 '폭풍의 곶'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먼 옛날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 등 제국들에게는 이 땅이 희망봉이었을지 모른다.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발견한 땅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희망곶의 발견은 절망이었을 것이다. 더 많은 유럽의 배가 희망봉을 거쳐 동쪽을 향했고, 자연스럽게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정착하여 그곳의 재물과 사람을 탐했다.

어릴적 나는 대항해시대 거대한 범선과 갤리선, 드넓은 바다에서 펼쳐지는 교역과 전투에 빠졌었다. 그 얼마나 매력적인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사나이들의 이야기. 하지만 스페인, 포르투갈을 가보고 그리고 또 대항해시대의 큰 상징인 희망봉을 가본 뒤 철없는 영웅담에는 흥미가 사라졌다. 누군가의 희망 맞은 편에 놓인 절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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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던 희망봉이 아니었다. 재밌게도 한 무리의 국회의원들을 봤다.

희망봉 방문은 여행의 가장 현실적인 단면을 보여주었다.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막상 가보더니 생각과 달랐을 때 느끼는 그 오묘한 감정을 보았다. 단순히 안 예쁘다던가 사람이 많았다는 정도면 모르겠지만 특유의 우중충한 날씨가 더 해져서 그런지 희망봉에서는 우울을 느꼈고 회한을 느꼈다. 일종의 정복심리를 가지고 이곳을 꼭 와봐야겠다는 욕심을 품었다는 사실은 나를 씁쓸하게 했다.

하나 재미있는 점은, 남아공 케이프타운, 그것도 희망봉에 있는 몇 안 되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같은 나라에서 온 국회의원들을 만났다는 점이다. 가이드 분한테 듣기로는 주남아공한국대사가 수행해서 데리고 왔다는데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현지 교민이 그렇다니까 그렇다고 들었는데 아무튼 덕분에 신기한 추억을 하나 만들 수 있었다. 희망봉에서 우리나라 국회의원이라니. 더 재밌는 사실은 다음날도 테이블마운틴에서 봤다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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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프론트에서의 저녁

가이드분께서 큰 쇼핑센터가 있는 워터프론트에 내려주셔서 저녁을 먹고 장을 보기 수월했다. 가이드가 추천 해준 Belthazar에서 스테이크에 와인을 한 잔 했다. 등심, 안심을 기본으로 하고 나머지 두 개는 게임스테이크로 쿠두와 임팔라를 각각 시켜보았는데 우리가 깨달은 것은 왜 사람들이 소를 사육하고 먹는가였다. 괜히 식용으로 사랑받는 동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여독을 풀며 워터프론트의 일몰과 야경을 보고 있자니 와인 한 잔에 적당히 취기가 돌았다. 남아공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와인 한 잔이라. 오늘 여행 중 가장 희망적이었던 순간은 저녁 식사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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