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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Sep 23. 2016

방, 가장 안전한


 내 꿈속의 아이는 방구석에서 홀로 점토를 주무르며 시간을 보낸다. 아이의 손끝에서 점토가 움푹 파였다, 볼록 튀어나왔다 하면서 사람이, 건물이, 숲이, 세계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아이가 만든 거대한 학교는 성 모양이다. 지붕 끝이 뾰족한 게 고풍스럽다. 나는 그 유서 깊은 학교의 여학생이다. 우리는 폭이 넓은 남색 강을 하나 두고 건너 편의 학교와 대치하고 있다. 매일 아침, 학생대표가 전쟁의 여신 아테나로 변장해 강 너머로 번개를 던진다.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나와서 번개가 어디에 꽂히는지 구경한다. 보통 맞은 편의 기슭에도 닿지 못하고 강에 풍덩 빠져버린다. 그러면 전류들이 형광색 실타래의 모습으로 강물에 떠오르면서 아주 잠시, 공기가 찌릿찌릿해진다. 백에 하나, 번개가 앞뜰에 다다랐어도 아무도 해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강 건너의 학교와 매일 하나씩 번개를 주고받아왔다. 목표는 서로의 학생대표를 맞춰서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학생대표는 늘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학생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아침의 고비만 넘기면 낮과 저녁과 밤 동안 제우스처럼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편의 학생대표가 던진 번개가 최초로, 적의 발뒤꿈치에 명중하고 말았다.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불시의 승리였다. 이를 계기로 두 학교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표를 잃은 건너편 학교로부터는 거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배를 타고 우리를 응징하기 위해 남색 강을 건넜다. 하지만 우리 학교의 사람들은 모두 나처럼 키가 작기만 했다. 도망치는 수뿐이었다.

 나는 강가에서 거인이 선배 한 명을 덮치는 것을 목도했다. 그의 손아귀를 겨우 피해 교내로 들어왔다. 혼란 속에서 학생들이 지하 벙커를 향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어디로 숨어야 거인들을 피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했다. 비명을 지르는 인파를 거슬러 3층으로 올라온 뒤, 교직원 화장실로 대피했다.

화장실은 정사각형의 아이보리색 타일들로 뒤덮여 있었다.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딱지만 한 크기였는데, 벽과 바닥에 모눈종이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작은 공원만 한 화장실의 좌측엔 세면대와 샤워실, 분홍색의 푹신한 휴식용 소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우측엔 동그란 변기들이 쭉 줄지어져 있었는데……

 쿵쾅쿵쾅

 거인들이다! 점점 다가오고 있다.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화장실이 안전하지 않았다. 분홍 소파 위에 달린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학교 뒤뜰의 숲에 떨어진 나는 온 힘을 다해 뛰었다. 함께 이곳으로 도망쳐 나온 다른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그중 코가 긴 소년이 한 명 있었다. 나는 정신이 없는 가운데에도 소년이 화난 강아지처럼 잘생겼음을 놓치지 않았다.

 숲의 중심부에 이르자, 거인들의 소리가 멀어진 대신 요란하게 울어대는 말의 무리와 맞닥뜨렸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나무로 조악하게 짜인 목마였다. 목마들은 광기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를 향해 매섭게 앞발을 치켜들었다. 엄연한 동물의 영혼을 지녔는데 식물의 몸을 가진 탓에, 그 생명력들 사이의 괴리를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린 듯했다. 이들은 아마, 상대편이 거인들을 대기시켰듯이 만에 하나 발생할 전쟁에 대비해 우리 학교 쪽에서 준비한 병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목마들은 통제할 수 없는 아군 같았다. 적시에 출격시켰다 하더라도 거인들과 성실히 맞설지, 아니면 도리어 우리들에게 돌진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왜 이런 깊은 숲에 그들을 유기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숲의 핵까지 찾아온 사람들을 보고 말들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마치 포도주에 잔뜩 취한 것처럼 발광하는 그들을 피해서 계속 앞으로 뛰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졌고, 숲의 끝에선 나와 소년만이 남았다. 우린 탈진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온몸이 붉게 물드는 기분이었고 갈비뼈가 주체할 수 없이 욱신거렸다. 땀이 줄줄, 속눈썹을 타고 흘렀기 때문에 시야도 흐려졌다. 정신이 혼미했다. 가장 기본적인 인식, 내가 누구이고 지금은 몇 시쯤이며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지에 대한 감각마저 무너졌다. 그저 옆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만이 누군가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때 베이지색의 토가(toga)를 입은 거대한 아폴론 신을 보았다. 아폴론은 여기까지 살아남았으니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와 소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장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간청했다. 신은 학생대표실 책장 뒤에 비밀 응접실로 이어지는데, 열쇠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으니 그곳으로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빨리 위험을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에 아무 의심 없이, 최고로 이성적인 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느새 우린 다시 학교로 들어와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 안이었다. 와인색 벨벳 소파들이 장작도 없이 불타는 난로 앞을 차지했다. 벽에는 로코코 양식의 금박 넝쿨이 화려하게 드리워져있었다. 방의 바깥에선 거인들이 이곳저곳으로 들이닥치는 굉음, 학생들의 비명, 목조의 파열음, 유리 깨지는 소음이 울려 퍼졌고, 벽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지만, 우리만은 안전했다. 다른 학생들처럼 서둘러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이 방은 모든 소란 속에서 느긋하게 떠다니는 배였다. 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그러나 어느샌가 어떻게든 내던져진 그런 시공 속에 나와 소년이 마주 보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시련이 그와 나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소파 옆에 놓인 주전자에 눈독을 들였다. 테이블엔 느긋한 시간을 위한 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엔 검은색 바탕에 주황색 인간이 그려진 그리스식의 그릇들이 소년의 주먹만 한 참외 열네 개를 담고 있었다. ‘오리엔탈’ 멜론인 참외는 그릇과 어울리지 않았다. 소년은 참외를 하나 집어 적당히 씹고 삼킨 뒤, 주전자를 들어 잔에 음료를 따랐다. “믿을 수 없어. 이 평온……” 내게 말을 거는 소년의 발음이 어눌했다. 멍청해 보이는 동그란 눈이 매력적이었다. 귀엽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애완 야수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그 볼을 꼬집고 싶었다. 그가 물었다. “마실래?”

 나는 거인들이 날뛰는 와중에 이런 절망적인 감격에 겨워하며, 오늘의 두 번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잔을 입술에 대고 음료가 혀끝과 최초로 키스하는 순간, 남색의 강렬한 네온사인이 시야를 마비시켰다. 세계놀이에 신물 난 아이가 남색 점토로 모든 건물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표정은 마치 기계처럼 어두웠다. 그는 남색의 권태로 뒤범벅된 점토 덩이들을 더욱 구석으로 몰아넣고 잠을 청했다. 아이가 베개에 뒷목을 대는 순간 나의 꿈이 끝나버렸다.



Cover image: Edvard Munch, the Day After, 1895, oil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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