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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Apr 06. 2016

완벽주의에 관하여



 사유두 방향을 갖는다. 하나는 나의 바깥으로 발산하고, 다른 하나는 내 안으로 수렴다.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전자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고 다. 많은 경험을 해보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자신 밖의 세계를 마주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된 나는 오히려 두 번째 사유에 골몰했다. 입시공부에 매진하느라 돌보지 못했던 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다.


 고등학교 때도 스스로가 상처투성이인 것을 알고는 있건만, 정신이 그토록 황폐해져 있을 줄은 몰랐다. 내 맘은 땅이 쩍쩍 갈라진 사막 같았다. 태양 같은 정열도 없고 밤의 추위만이 계속되는 건조한 대지, 이것이 내 정신의 지형이었다. 아무리 격려와 행복의 물을 부어도 사막 비옥해지기를 거부했다. 반면 작은 실패에도 거대한 모래바람을 몰고 와서 일체의 습기를 말살하곤 했다.

 모래의 이름은 강박이었고, 사람들은 내 안의 사막을 주로 '완벽주의'라고 불렀다.


 완벽주의는 내게 그림자 같은 것이라 어찌 떨쳐낼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스스로가 무능하다고 느껴지면 좌절감과 자괴감이 모래폭풍처럼 몰려온다. 공부를 할 때, 글을 쓸 때 특히 그렇다. 그러나 스스로가 완벽주의자임을 모르는 채로 강박에 시달리는 것과, 자신의 성격적 특이점을 인지하고 사는 것은 다르다. 나는 내가 불쌍한 완벽주의자임을 인정한다. 내 메마른 가슴은 불모이다!

 일단은 것으로 되었다.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오아시스에의 희망이 생길 것이다.



Cover image: Frida Kahlo, <Self-portrait as a tehuana>,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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