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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Apr 17. 2016

철학은 왜 재미있는가

내게는 RPG게임 같은 철학


 

 처음으로 철학에 재미를 느낀 건 열일곱 살 무렵이었다. 이진경의 『철학의 모험』이란 책을 읽으며, 철학자들이 사상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모습이 예술 행위처럼 느껴졌다. 경제학도를 꿈꿨던 내가 부모님께 돌연히 철학과를 가겠다고 선언했을 정도로 철학에 푹 빠졌었다.

 그렇게 열여덟이 되어 사회탐구 과목으로 '윤리와 사상'을 배우게 되었다. 공책을 빼곡히 채워가며, 사상가와 그의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즐거웠다. 돌이켜보면 내가 교과서에 나온 내용들을 너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때는 비판이나, 정신의 운동으로서의 사유, 역사적인 의의 등 현재 내가 철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잘 몰랐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에 더해 철학을 좋아한 결정적인 이유는 'RPG게임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철학과 RPG게임이라니?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까마귀와 탁자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보란 수수께끼 같지만, 나는 둘의 유사성을 확신했고 그로부터 적지 않은 쾌감을 누렸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게임광이었다. 혼자서 컴퓨터 앞에 있던 시간이 많았던 탓에 각종 온라인게임과 CD게임 을 섭렵하면서 자랐다. 특히 초등학교 3학년 때 '트릭스터AD'란 게임을 시작하면서 RPG게임의 매력에 푹 빠졌다. 창의적인 설정, 모든 플레이어와 NPC들을 관통하는 서사, 아름다운 맵, 신기한 몬스터, 귀엽고 정교한 아이템들, 스킬의 이펙트 같은 것에 미친 듯이 이끌렸다.


 ▲게임 '트릭스터'의 플레이 화면. 플레이할 당시 스크린샷을 찍어두었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퀘스트'라는 시스템이 가장 흥미로웠다.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어떤 NPC가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면서 특정 아이템을 구해달라고 하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면 특별한 보상을 받는 제도라니! 모험심과 책임감, 재미와 보람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열여덟살의 나는 철학자들이 마치 각각 하나의 NPC처럼,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일종의 퀘스트처럼 느껴졌다.


 예컨대 벽난로가 있는 맵에 들어가면 '르네 데카르트'란 이름의 NPC가 내게 말을 걸고, "절대 회의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전능한 기만자'란 이름의 보스 몬스터를 물리친 다음 '생각의 구슬'이란 아이템을 얻는다. 생각의 구슬을 NPC 데카르트에게 가져다주면 그는 "네 덕에,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고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고마워."라고 말하면서 경험치를 준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방법적 회의'라는 스킬을 배우고, 아이템으로『방법서설』과 『성찰』을 받아오는 건 덤.

 합리론자 데카르트의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엔 경험론자 베이컨을 예로 들자. '신 아틀란티스'라는 맵에 도착하면 NPC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봐! 나 좀 도와줘."라고 말을 걸고, "무엇이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는가?"라 묻는다. 퀘스트를 받은 나는 사냥을 하러 필드로 나간다. 첫번째로 목각인형처럼 생긴 인간형 몬스터를 죽이면 '종족의 우상'이란 아이템을 획득하고, 두번째로 동굴로 들어가 이끼 같이 생긴 몬스터를 물리치면 '동굴의 우상'을 얻는다. 세번째로 번화가로 나가서 말이 많고 시끄러운 용을 물리치면 '시장의 우상'을 획득하고, 마지막으로 어느 극장에 들어가서 스스로를 과시하는 유명 광대들을 물리치면 '극장의 우상'을 얻는 거다. 이렇게 네 개의 우상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챙겨서 NPC 베이컨에게 가져다주면 "고마워! 네 덕에 선입견을 배제하게 되었어. 선물로 이 기술을 줄게!"하면서 '귀납법'이란 이름의 스킬을 가르쳐준다. 『신 기관』을 받아오는 건 덤.

 이렇게 각 철학자가 내놓는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그의 저서들을 우표 모으듯 수집하면, 마치 루피가 해적왕을 꿈꾸듯 나도 진리왕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왼)르네 데카르트, (오)프랜시스 베이컨


 현재는 대학에 들어와서 철학을 부전공하고 있다. 스물 두 살이 되어 다시 만난 철학은 고등학교 때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스스로가 지적인 모험을 하는 RPG게임의 주인공으로 여겨진다. 덕분에 어린아이가 게임하듯이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철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글쓰기에도 재미를 붙였다.

 고등학교 때는 철학사를 바탕으로 RPG게임을 만든 뒤, EBS와 연계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게임을 통해 철학을 접하게 하면 재밌겠다는 공상도 했었다. 급식을 먹으면서 앞에 있던 친구에게 열변을 토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시간이 남으면 철학사를 중심 소재로 해서 게임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일단 다음주까지 제출인 에세이를 써야하지만 말이다.



Cover image: Gustav Klimt, Philosophy, 1899~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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