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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Apr 14. 2016

각자의 시간의식에 대하여

'사적 유토피아'를 위한 공상


 시간은 절대적일까?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절대 뒤돌아가지 않는 시간은 몇 시, 몇 분, 몇 초라는 정확한 숫자로 표현된다. 그렇게 보면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다. 태양이 중천에 걸린 오후를 밤 10시라고 주장할 이는 없고, 수업은 전체 수강생에게 같은 시각에 끝나며, 1월 1일은 모두를 동시에 찾아간다.

 하지만 시간은 상대적이다. 아인슈타인의 어려운 이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광속에 비하면 달팽이보다도 못한 속도로 움직이는 우리들 가운데,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시간차는 포착되기도 어렵다. 나는 사회적 시간개인적 시간에 대해 논하려 한다.

 각 사회와 문화마다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은 다르다. 예컨대 농민과 유목민은 같은 계절을 상이하게 받아들이고, 삶의 템포도 중시되는 날짜도 다를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우도'를 생각해보자. 우도는 제주도의 옆에 있는 작은 섬이다. 우도에서는 제주도로 가는 마지막 배가 떠나는 5시가 지나면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 5시는커녕 밤 10시에도 불빛으로 눈부신 서울과 철저히 대비된다. 우도민들에게 '다섯 시'라는 시각은 외부인들에게보다 훨씬 더 의미 있을 것이다.

 나아가 개인의 사정마다 시간은 다르게 의식된다. 휴학한 대학생에게 월요일은 또 다른 휴일이지만 직장인에게는 힘겨운 한 주의 시작이다. 해수욕장의 직원에겐 여름이, 스키장의 직원에겐 겨울이 중요하다. 고고학자에게는 먼 옛날이, 주식 전문가에게는 가까운 미래가 절실하다.

 그렇다면 '나'의 시간의식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사회대과 인문대를 발빠르게 오가며 전공수업에 시달리는 삼학년의 대학생인 나에게 시간이란 어떻게 체감될까? 이 글은 고로, 시간을 주제로 한 자아성찰이다.


 일단 수업이 있는 월화수목요일과 수업이 없는 금토일요일로 나눠볼 수 있겠다. 전자의 나는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다소 긴장해 있다. 영감의 안테나를 꼿꼿이 세운 채 어엿한 사회학도가 되기 위해 애쓴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생활을 아쉬워 하며 옷도 제법 차려 입는다. 반면 후자의 나는 츄리닝차림의 잠만보가 되어버린다.

 더 구체적으로는 철학이론 수업이 많은 월/수요일과 사회학실습 수업이 있는 화/목요일로 나눌 수 있겠다. 날짜를 번갈아가며 학구적인 정체성이 바뀌는 느낌이지만 다양한 걸 배우는 기분이 나쁘진 않다.

 하지만 위와 같은 시간 구분은 외부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 대학이 제공한 수강편람에 과거의 내(엄밀히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볼 수 있다)가 확정해버린 시간표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에게도 유의미한,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구성된 시간의식은 어떠할까?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내게는 밤낮과 관계없이 바쁜 시간과 한가한 시간, 의무를 이행하는 시간과 즉흥적인 자유를 즐기는 시간, 더 집약적으로는 '죽은 시간''살아있는 시간'으로 나뉘는 것 같다. 나는 당연히 살아있는 인간인데 그런 구분이 가능하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단순한 생명의 유지와 '내가 살아있다는 그 생생한 느낌'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작년의 나는 한 후배의 자기소개를 계기로 '살아 있음'의 감성에 대해 처음 고민하게 되었다. 그 이전의 나는 스스로가 생명을 지닌 채 이 세계 속에서 숨쉬고 있다는 진실을 특별히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철학과 후배가 "저의 좌우명은 '나는 매 순간 살아있고자 한다'입니다."라고 말한 순간, 어떨 때 내가 삶에 진실로 몰입하는가, 나는 매 순간 삶을 음미해왔는가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내가 언제 '살아있음'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지 추적해왔다. 첫째로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련, 미래에 대한 망상이나 불안 없이 지금, 여기 내 앞의 일에 100% 집중해있을 때, 내 안에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둘째는 이 세계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예컨대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때 나는 순수한 설원에 최초로 발걸음을 디디는 듯한 느낌을 받아왔다. 마지막으로 '나는 강하고, 세상은 아름다우며, 나는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나이다'라는 네 가지 신념을 깨닫고 되뇌일 때 그러했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살아있는 시간'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먼저 내 안에 생기가 흘러넘치면서 창조적인 행위를 하고 싶은 욕구가 솟는다. 이유 있는 자신감과 그에 근거한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영감이 내게 펜을 쥘 것을 명령한다. 단순히 공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상을 실천으로 옮긴다. 그 동안 나는 에너지를 사용함과 동시에 재충전하며 육체와 정신, 영혼 모두가 건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반면 '죽은 시간'은 무의미한 휴식을 제공한다. 아무 생각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든지, 자극적인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시간을 마냥 보낼 때 나는 문득 내가 죽은 것만 같다. 몸을 움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히 나태하고, 이유없이 무력하고,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잡념들이 머릿속에서 리모콘 채널 돌리듯 여기 터졌다 저기 터졌다 한다.

 성스러움의 차원에서 보면 '살아있는 시간'은 삶의 의미를 체험하는 시간이고, '죽은 시간'은 삶의 의미를 의문시하면서 방황하는 시간이다. 어떻게 보면 죽은 시간을 완전히 혐오할 수 없다. 영혼이 죽은 듯이 삭막한 순간들이 있어야, 생명력이 봄의 벚꽃처럼 갑자기 만개할 때의 찬란함을 더욱 절절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시간의식은 어떠한가? 당신은 어떤 물리적 시간표 하에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감성적인 시간관을 갖고 있는가? 나아가 당신은 현재 이 시각에 시체처럼 무기력한가, 아니면 나비처럼 살아서 생명력을 주체 못하고 의미의 날개를 퍼덕이고 있는가?



Cover image: 르네 마그리트, Time transfixed,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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