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준 Feb 01. 2023

질투(?)

 

  

대학을 마치고 나는 서울에 있는 사립 남자 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나 이외에 한 명의 미술 교사가 더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대학 3년 선배였다. 그렇다고 대학 다닐 때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1학년에 다닐 때, 그는 휴학을 하고 군 복무 중이었고, 내가 1학년을 마치고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선배는 전역과 동시 복학을 하여 공부를 마치고 졸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온화한 성격에 예의를 중시하는 유교적인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연세가 드셨거나 젊은 선생님이나 모두 훌륭한 인격을 갖춘 선배를 칭송했다. 

선배는 작품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작업과정이 복잡하고 힘든 석판화였지만 몸 사리지 않고 밤늦게 까지 학교에 남아 작품을 했고, 일요일도 학교에 나와 늦도록 작업을 했다. 

선배는 매주 토요일 인사동이며 사간동, 동숭동에 있는 갤러리들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나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선배가 동행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나도 미술작품 감상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배는 연극이나 영화를 감상하러 갈 때면 같이 가자고 요구했고 나는 흔쾌히 응했다. 그러다 보니 바늘과 실같이 사이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계절에 따라 곱게 치장한 산을 찾아 등산을 하기도 했고, 물안개 피어올라 동양화 같은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했다. 화천 파로호에서는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내리는 별빛을 맞으며 밤을 새워 낚시를 하기도 했고, 겨울에 설악산에 가서 며칠 동안 눈 속에 파묻혀 생활하기도 했다.


나는 선배 같은 훌륭한 인격을 갖춘 분을 만난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를 친동생 이상으로 챙겨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선배 같은 사람이라면 평생을 변함없이 따르고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내 첫 번째 개인전을 가지면서였다. 

나는 그룹전은 가끔씩 참여해 왔지만 개인전은 40대가 넘어서야 처음 가졌다. 그동안 꾸준히 제작했던 석판화 작품 31점을 인사동에 있는 K 상업 갤러리에 내걸었다. 작품을 남에게 선보인다는 것은 마음 설레는 기쁨이면서, 한편으로는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은 부끄러움에 아무도 없는 곳으로 꼭꼭 숨고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전시회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찾았고 작품을 구매하겠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 

놀라운 일은 전시회를 오픈하고 5일째 되는 날 일어났다. E 그룹 문화 사업부에서 내 전시된 그림을 모두 매입을 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것이다.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꿈같은 상황에 몇 번이고 얼굴을 꼬집어 보았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선배에게 알렸다. 선배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내 기대와는 달리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나의 첫 번째 개인전이 끝난 후부터 선배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항상 친동생 이상으로 손잡아  주던 태도에서 나를 무시하고 비아냥대는 태도로 바뀌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무조건 부정적으로 응대했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융화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껄끄러운 관계가 이어지던 즈음에 선배는 수도권의 한 대학의 전임교수 자리를 얻어 떠났다.

 

몇 년이 흘렀다. 선배와 나는 어쩌다 한 번씩 만났지만 예전같이 정과 온기가 흐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막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고 서먹서먹 했으며 냉냉한 기류가 흘렀다. 

나는 작품 활동을 열심히 했고 매년 개인전을 가졌다. 첫발을 떼기가 힘들지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었다. 

독일과 덴마크에서도 개인전을 가졌다. 모 대학 교수가 나와 대학 후배 두 명을 동참할 수 있게 다리를 놓아준 덕분이었다. 

덴마크에서 전시를 하는 동안에는 교민 한 분과 특별한 친분을 가질 수 있었다. 발이 넓은 그분의 도움으로 그다음 해에도 코펜하겐에서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까지 했다. 

원래는 모 대학 교수와 후배 그리고 나 세 명이 초대를 받았으나 교수가 건강상의 이유로 포기하는 바람에 후배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후배와 나는 상의 끝에 선배를 참여하게 하는데 동의했고, 선배의 의향을 물으니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덴마크 전시, 나는 소원해진 선배와의 관계가 거리를 좁혀줄 것이라고 기대 했다. 그 전시가 선배와 나의 관계를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게 만들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사건의 발발은 두 가지가 빌미를 되었다. 

첫 번째는 전시를 소개하는 신문 기사였다. 전시회에 대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작품 사진이 한 점 실렸는데 그 작품이 선배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었다. 아마도 선배의 모노크롬의 추상 작품보다는 색채가 다양한 내 구상적 작품이 시각적인 효과가 있어 선택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내 작품은 13점이나 팔렸는데 선배는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품이 팔린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 작품이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예술성보다는 대중성이 강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일로 우쭐할 것도 고무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선배는 이렇게 돌아가는 상황이 자존심이 상한 듯 벌레씹은 얼굴이었다.


전시회가 진행 중이던 어느 날, 교민 여러분들과 함께 저녁 모임을 가질 때였다.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가는데 뜬금없이 선배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후배는 작품을 그렇게 아무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건 작품이 아니야. 물감 가지고 장난치는 것에 불과해. 제대로 된 작품을 하려고 노력해야 돼.” 선배가 나에게 건네는 말이 화살이 되어 나의 심장을 찔렀다. 나는 어떻게 응대할지 몰라 멍청히 눈만 끔벅거리고 있어야 했다.

선배가 한 말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나를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대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런 자리에서 꺼낼 성격의 말은 아니었다. 

정말 나를 위한 조언이나 충고를 하고 싶었으면 나와 둘이 있을 때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는 선배의 충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뉴욕과 런던에서 7년 동안 미술 공부를 하느라 선배와는 연락을 끊고 살았다. 한국에 귀국하여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역시 연락을 끊고 생활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나는 덴마크에서 교민들과 모임에서 선배가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저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질투. 시기가 아니었을까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질투. 시기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하는 것을 말한다. 

선배는 화가로서 청청하게 서 있는 큰 나무였고, 나는 줄기를 뻗어 나가는 어린 나무나 진배없는데 왜 하찮은 나에게 질투를 한 것일까?

 

기원전 1세기 시리아 출신의 로마 작가인 퍼블릴리어스 사이러스는 용기 있는 사람, 또는 행운의 사람들은 남들로부터 쏟아지는 질투심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아직까지도 선배의 말이 내 가슴에 상처로 남아 욱신거리고 있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유지되는 것을 보면 나는 용기 있는 사람도 행운의 사람도 아닌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