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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Jul 12. 2023

뉴욕으로 떠날 결심




3월이 되면 런던은 온통 수선화(Daffodils)로 뒤덮인다. 너른 바다에 푸른 파도가 넘실대듯 노란 물결로 도시가 일렁인다. 

수선화는 그 어떤 꽃보다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미 2월부터 차갑고 단단한 땅을 뚫고 나오는 수선화의 어린 생명을 바라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비와 찬바람 속에 하루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여린 잎을 바라보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으며, 볼이 차가울 정도의 낮은 기온 속에서 노란 꽃을 피워내는 것을 보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 집 정원에도, 옆집 정원에도, 거리에도, 공원에도 가득 채운 수선화는 길고 삭막했던 런던의 겨울 풍경을 말끔히 씻어내고 화사한 미소로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충실히 한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수선화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쓰기도 했다.

(생략) 수선화들이 마음의 눈에 나타나 축복 같은 고독에 반짝이네.

그리하면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수선화와 함께 춤을 추네. 


노란 희망의 꽃 수선화가 피어나듯이 두 딸에게서도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런던에 온 지 10개월이 되고, 학교생활을 시작한 지 7개월이 되자 언어소통의 불편함이 거의 사라졌고, 교우관계도 원만해졌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알렉산더 대왕의 말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남아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두 딸이 남다른 노력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에는 쥬리앙과의 영어과외도 끝낸 상태였고, 그 어떤 과목도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 

두 딸은 학교에서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에 매달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배운 것을 한번 훑어보고 숙제나 하는 정도였다.

방과 후에 학원과 과외 교습소에서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와 밤잠을 설치며 공부하는 우리나라 학생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두 딸이 서울에 있었다면 학교성적은 명단 끝부분을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이곳 영국(런던)에서 사교육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비단 영국뿐만 아니라 서구의 많은 나라들, 아니 전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사교육 없이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을 볼 때면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애처롭기만 했다. 

왜 우리나라에선 사교육이 사라지지 않고 점점 극성을 부리는 것일까? 

서양의 부모들도 우리나라처럼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에 가는 것을 바라는 것은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공부를 잘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고 있었다. 공부를 못해도, 대학에 가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 열심히 하면, 명문대 나온 사람들과 차별받지 않고 충분한 돈을 벌어 넉넉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학벌 중심의 왜곡된 임금 격차와, 대학을 나오지 못했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며 사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가 된다면 사교육을 몰아낼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킹스턴(Kingston) 방향으로 20여분 가면 코리아 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뉴 몰던(New Maldon)이란 곳이 있었다. 

이곳은 한국의 한 소도시를 옮겨 놓은 것 같았다. 한식 음식점들, 미용실, 부동산, 카페, 슈퍼마켓, 떡집, 반찬가게, 옷 가게, 기념품 가게, 꽃가게 등이 즐비했다. 한글, 또는 한글과 영문을 혼용한 간판을 내걸고, 뉴 몰던의 중심가인 하이 스트리트를 비롯하여 킹스턴 로드를 따라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리에는 많은 한인들이 메우고 있고 반가운 우리말을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게 정겹고 훈훈했지만 불편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몇 개의 학원들이었다. 한국 학생들 중 일부는 방과 후에 이곳에 와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했다. 방학이나 하프텀 때엔 집중적인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외국에 나와서도 사교육에 매달리고 있는 우리나라 학생들, 아니 사교육의 장으로 자녀를 몰아넣은 부모들의 처사가 그저 놀랍고 씁쓸하기만 했다. 


런던에 자리를 잡은 후 근교 여행은 가끔 해왔지만, 다른 나라를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이스터(부활절) 홀리데이를 맞이하여 3박 4일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이탈리아는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나라여서 마음 같아서는 많은 지역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3박 4일은 긴 시간이 아니어서 무리하게 계획을 잡지 않았다. 로마와 폼페이, 카프리 섬으로 제한했다. 베니스와 피렌체도 빼놓고 싶지 않았으나 시간상 다음으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 동안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를 가나 고대와 중세의 역사적인 건물들이 시야를 압도했고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두 딸의 입에서도 계속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고대 로마시대에 건설된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 1000년 동안이나 찬란한 고대 로마의 중심지였으나 폐허가 된 프로 로마노, 로마에서 돔 구조 중 가장 오래된 판테온 신전 앞에서는 두 딸의 눈은 더욱 초롱초롱 해졌다. 

만화 먼 나라 이웃나라 이탈리아 편을 읽었기 때문에 역사의 현장을 직접 둘러보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것 같았다. 

영국에 갈 때에 그 책은 가지고 갔기 때문에 작은 딸도 여행을 앞두고 읽은 상태였다.


우리는 거대한 조각 작품 같은 트레비 분수 앞에서 몸을 뒤로 돌아 동전을 세 번씩이나 던졌다. 로마에 다시 올 수 있다는 말을 굳게 믿으며. 

스페인 광장의 층계에 앉아 천연재료로 만든 입에서 살살 녹는 젤라토(아이스크림)로 몸에 달라붙은 피로를 떨쳐 내기도 했다.

로마 안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적은 나라, 하지만 볼거리로 꽉 찬 바티칸도 방문했다. 바티칸 미술관을 꽉 메운 중세 미술작품들과 시스터나 성당의 천정화를 보면서 놀라움과 벅찬 감동을 맛보기도 했다. 


로마에서 나폴리까지는 고속 기차로 1시간 거리이고 폼페이와 카프리섬이 인근에 있어서 여행이 순조로웠다

서기 79년에 나폴리에 있는 베수비오산의 분화로 잿더미에 묻혔다가 발굴된 시간이 멈춰버린 폼페이의 옛 모습을 둘러보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카프리 섬을 구경했다. 

카프리는 까마득한 고대 로마시대부터 황제, 귀족,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지금도 세계적인 부호들이 이곳을 찾아와 별장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런던에서 생활한 지 10개월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있을 때는 미술작품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매달려 있었다. 

널찍한 작업실에는 페인팅과 판화를 할 수 있는 도구와 재료들이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석판화 작업을 위하여 전지 사이즈를 찍어낼 수 있는 대형 프레스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런던에서는 스케치북에 에스키스나(작품 하기 전 밑그림) 하는 정도였다 

작품이란 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발로 그리라는 말이 있다. 많은 것을 직접 찾아가서 보고 느끼라는 말이다. 런던에서 미술관과 갤러리를 내 집 드나들듯이 하고 있었지만 그것 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미술대학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디 아트 스튜던츠 리그 어브 뉴욕(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을 떠올렸다. 1875년에 설립된 미국 뉴욕에 있는 아트 스쿨이었다. 

96년, 교직에 몸담고 있을 당시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한 달 동안 공부한 경험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 학교는 누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국가와 인종, 성별을 차별하지 않고 문을 열어놓은 학교였다. 회화(수채화, 오일페인팅, 드로잉, 초상화, 크로키 등) 판화(동판화, 석판화, 목판화 등) 조각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본인이 원하는 과목을 신청해 배울 수 있고, 기간도 본인의 상황에 따라 정할 수 있었다. 일주일을 공부할 수도 있었고, 10년 이상을 할 수도 있었다. 학비가 저렴했으며, F-1(학생비자)이 필요한 외국인 학생인 경우엔 포트폴리오, 미술 전공 증명서(졸업장), 재정 증명서를 제출하면 해결되었다. 


‘그래, 이곳이야! 바로 이곳이야!.’

나는 디 아트 스튜던츠 리그 어브 뉴욕을 떠올렸을 때, 금맥을 발견한 광산업자 같은 심정이었다.

이 학교에 구미가 당기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입학이 까다롭지 않았고, 영어 점수 (TOEFL 점수)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대학과정을 마쳤거나 석사학위를 받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질 높은 수업이 가능했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곳에선 학점이 없고 학위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정식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대학에서 요구하는 영어점수만 획득하면 뉴욕과 런던에 입학할 수 있는 학교를 이미 확보해 놓은 상태였으니까.


아내와 두 딸에게 이 학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뉴욕에 가는 것에 대해 의사를 물었을 때, 모두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한 목소리로 찬성했다. 아마도 몇 년 전 뉴욕 여행을 하면서 좋은 추억들이 남아 그곳에 미련을 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두 딸이 학기를 마치는 6월 중순에 우리는 런던에서 뉴욕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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